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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사막으로 간 영혼의 수도사… ‘지혜의 일곱 기둥’

입력 | 2006-11-25 03:03:00

지혜의 일곱 기둥의 저자 T E 로렌스


◇ 지혜의 일곱 기둥/T E 로렌스 지음·최인자 옮김/전3권 각권 421∼500쪽·각권 1만8000원·뿔

전설적인 작품을 대할 때면 누구나 가슴 떨림을 경험한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원작으로 전설처럼 떠돌던 이 책을 접한 독자는 그런 가슴 떨림으로 첫 장을 펼칠 것이다. 단언하건대 독자여 영화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60여 쪽의 서장을 읽는 순간 그대의 가슴 떨림은 전율로 변할 것이다.

“아랍의 사막은 영적인 얼음집이었다. 그 속에서는 신과의 합일이라는 비전이 모든 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그러나 더 이상 발전된 것도 없이 그대로 보전되고 있었다.… 이 신앙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석할 필요가 있다. 박쥐의 고함소리는 너무나 날카롭기 때문에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막의 영혼은 우리의 거칠고 조악한 사고의 그물로는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피터 오툴이 연기한 ‘불안한 영웅’ 로렌스의 초상은 영혼의 지문처럼 이 책의 갈피마다 찍혀 있다. 누가 ‘반(反)영웅’을 20세기 후반의 산물이라고 했던가.

영국 옥스퍼드대를 수석졸업한 엘리트 고고학자였던 T E 로렌스는 1916년 28세의 육군 정보장교(대위) 신분으로 오스만제국의 해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것은 오스만제국 안에서 터키인과 하나가 됐던 아랍인에게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 ‘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불리는 오늘날 시리아, 리비아, 요르단, 이라크, 이스라엘 지역의 통치권을 주는 것이었다.

아랍독립전쟁이라는 거창한 명분이 달려 있던 그것은 거대한 기만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한편이었던 오스만제국을 분열시키기 위한 대영제국의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적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로렌스의 제의를 받아들여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서쪽 지역인 헤자즈를 지배하던 후세인 이븐 알리에게 오스만제국에서 분리된 통일아랍왕국의 수장 자리를 제의했다. 대신 영국과 한편이 돼 오스만제국에 대한 전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맥마흔 선언과 더불어 영국은 프랑스와 이 지역의 분할통치를 밀약한 사이크스피코협정을 체결했다.

로렌스는 이런 음흉한 계약 위반 사실을 눈치 챘으면서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 아랍인과 우정을 나누며 2년여간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이 책은 1916∼1918년 이집트에서 사우디의 메카로, 다시 홍해 유역의 아카바를 거쳐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이어지는 ‘사막의 전투’를 치르며 겪은 모험에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함께 녹여낸 그의 회고록이다.

이후 승리의 감격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영국으로 돌아간 로렌스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와 1921년 식민성 장관 처칠의 고문으로 영국과 아랍의 중재자로 활약한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아주 기이한 익명의 삶을 살았다. 가명으로 영국 공군과 육군전차부대, 다시 영국 공군에 번갈아 입대하며 속도광으로 살았던 그는 1935년 오토바이 사고로 숨진다.

많은 사람은 이 때문에 로렌스를 군인이나 모험가로 기억한다. 그러나 영국의 문학평론가 콜린 윌슨은 대표작 ‘아웃사이더’에서 로렌스를 화가 고흐나 무용가 니진스키를 능가하는 예술가로 극찬했다. 고흐나 니진스키가 ‘세상을 너무 깊이, 너무 많이 봐 버려’ 광기에 빠졌다면 그들보다 훨씬 지적이었던 로렌스는 아랍전쟁 참전 이후 ‘정신적 자살’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아랍계 미국의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이 책이야말로 ‘제국주의의 대리인’의 관점에서 쓰인 오만과 편견의 덩어리라고 비판했다. 실제 이 책에는 터키인을 대신해 중동지방을 다스릴 새로운 민족(아랍민족)을 세우겠다는 제국주의적 시각이 틈틈이 포착된다.

어떤 측면에선 이런 찬사와 비판을 먼저 거친 뒤 이 책을 읽은 것은 축복일 수 있다. 로렌스가 포착한 아랍인의 특질로서 강렬한 종교성과 자기부정성은 ‘육체의 감방에 갇혀 있으나 사고의 흐름은 중지할 수 없는 수도사’와도 같았던 로렌스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기도 했다. 온갖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면서 얼음처럼 차가운 통찰을 놓치지 않았던 그가 토해내는 문장들은 숨 막히도록 아름답다. 그것은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로 읊조렸던 청마 유치환의 시세계를 훌쩍 뛰어넘는 지독한 허무의 아름다움이다. 원제 ‘Seven Pillars of Wisdom’(1935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