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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동관]이제 湖南을 놓아 주세요

입력 | 2006-11-15 19:55:00


‘정치적 수사(修辭)’에 뛰어난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야당 총재 시절 호남지역에 가면 “호남이 내 호주머니에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호남 유권자 호주머니 안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호남을 기반으로 대통령이 된 뒤에는 “역사를 마주하는 자세로 일하겠다”는 말을 자주했다.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뒤에는 목표가 더 구체화됐다. 한 유럽 기자가 인터뷰에서 “당신은 이제 세계적 지도자다. 국제 인권 증진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생각이냐”고 묻자 “좋은 질문”이라며 흡족해 하기도 했다.

당시 노르웨이에서 열렸던 노벨 평화상 수상식에 동행했던 한 전직 고위 관료도 DJ에게 “정쟁(政爭)에서 손을 떼고 국제적 지도자로서의 역할과 국가적 어젠다 설정에 전념하라”는 장문의 편지를 쓴 일이 있다. 그러나 노벨 평화상을 받은 뒤 DJ가 한 일은 ‘햇볕정책’에 비판적인 보수 신문들에 대해 세무조사로 앙갚음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DJ의 퇴임 후 역할 모델은 국제평화와 인권활동을 벌이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랬던 DJ가 지난달 북한 핵실험 이후 다시 ‘호남 맹주(盟主)’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정치에 개입 않겠다”고 말했지만 목포에 내려가 3000여 환영 군중과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20년 전 야당 총재 DJ다. 물론 그 1차적 목표는 ‘햇볕정책 구하기’다.

DJ는 어제도 충남 공주대 초청강연에서 “미국 중간선거 결과를 보면 햇볕정책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됐다”며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노선이 북한 핵개발의 원인이라는 ‘미국 책임론’을 거듭 제기했다. 논리의 비약이자 강변이다. 그러면서 “북한의 정치적 인권 개선을 위해서는 북한 체제가 변화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북한 인권문제를 제대로 거론한 일이 없는 그로서도 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에 이제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DJ는 대북 송금 특검과 도청 수사 때 배은망덕(背恩忘德) 운운하며 그토록 분개했던 노무현 대통령과도 동교동 사저에서 만나 손잡았다. 그 바람에 민주당은 공황상태에 빠졌고 범(汎)여권 통합의 정지작업으로 먼저 탈당해 ‘제3지대’를 만들자는 열린우리당 일각의 움직임도 일시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정작 “DJ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은 가신(家臣)그룹인 동교동계 안에서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동교동계 사람은 아직도 ‘선생님’의 권위에 눌려 입을 다물고 있지만 뒤에서는 “왜 국정을 파탄 낸 노무현과 한통속이라는 욕을 도매금으로 먹느냐”는 거친 소리도 튀어나온다. 일부는 DJ의 면전에서 직언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호남 출신 의원들 간에도 정계개편과 관련해서는 “DJ가 나서면 될 일도 안 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심지어 “북에 무슨 꼬리를 얼마나 단단히 잡혔기에…”라는 불만마저 나오고 있다.

햇볕정책은 나름의 시대적 효용과 의미를 갖는 정책이지만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는 ‘불멸(不滅)의 도그마’가 아니다. 그것을 위해 다시 호남 맹주의 퇴영적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DJ의 존재는 이제 호남인의 자랑이 아니라 부담이자, 멍에가 아닐까. ‘이제는 호남을 놓아 주세요’라는 소리가 곧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