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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허엽]KBS, 새 술은 새 부대에

입력 | 2006-09-29 03:01:00


정연주 KBS 사장이 26일 연임을 위해 사장 공모(公募)에 응모했다. 그는 “공모 과정의 공정성을 위해서”라며 사퇴도 했다. 공모는 공개 모집이라는 뜻이지만, 공모(共謀·공동 모의)로 끝난 경우가 방송계 인사에서 여러 번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임기가 끝난 뒤 88일간 직무대행으로 자리를 지킨 정 씨가 탈락을 자초할 리 있는가?

KBS 노동조합은 정 씨의 연임에 반발하고 있다. 정 씨가 추진했던 ‘개혁’의 결과다. 이 정권 초기 노조와 청와대의 저녁 모임에서 그가 사장에 천거된 것에 비하면 세상이 달라졌다.

정 씨는 한국 공영방송의 가치를 높이는 데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편파 방송에 대한 비판으로 숙원인 ‘수신료 현실화’는 말도 못 꺼내고, 내부 분열도 초래했다. 월드컵 때 KBS를 비롯한 지상파 3사의 동시 중계 등 상업적 행태를 두고 “정 사장도 별 수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KBS 내부의 반발로 본다면 정 씨의 연임은 파국을 예고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정치권에서 다른 이를 거론해 보지만 “오히려 노조에 문제가 많다”는 정권의 인식에 입을 다문다고 한다.

정 씨가 한겨레 논설주간 시절 쓴 칼럼을 보면 그의 연임을 기대하는 정권의 갈증이 드러난다. 기자가 인터넷 한겨레에서 찾아본 그의 칼럼 40여 편 중 상당수가 이회창 대선 후보와 보수 신문, 미국 보수 진영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이다. 격한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기도 하고 “빗자루로 쓸어버려라” 등 선동도 자주 보인다. 방송의 ‘방’자도 없는 점이 아이러니다.

정 씨는 이 후보의 아들 병역 문제나 포용력 부족을 여러 차례 비판했다. 아들의 병역 문제에 관한 한 그도 자유로울 수 없는데 눈감고 비판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그는 미국 영주권을 가진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신청을 직접 해 공영방송의 리더 자격 논란을 초래했다. 특히 자질과 관련해 이 후보와 노무현 후보에 대한 평가도 사뭇 달랐다. 정 씨는 “(노 후보가) 이 후보의 대칭점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조폭 신문 독과점 깨기’ 등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조폭’ ‘족벌’로 비난한 것도 10여 차례다. 이처럼 집요하게 특정 신문을 공격하는 글에서는 균형 감각에 대한 의문도 든다. 책 ‘서울 워싱턴 평양’에서 그가 쓴 대로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도피 생활에서 맺힌 가슴의 응어리는 납득할 수 있지만, 칼럼이 한풀이의 마당은 아니지 않은가? 또 칼럼에는 ‘부자들의 잔치’ ‘승자와 가진 자의 사회’ 등 이 정권과 좌파의 입에서 걸핏하면 나온 말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정 씨는 취임 직후 시대정신을 앞세우며 이른바 ‘개혁’ 방송으로 한국 사회의 뿌리를 흔들었다. 그의 연임은 내년 대선 정국에서 그런 방송의 재탕이 펼쳐질 것이라는 신호나 다름없다. 더구나 다른 선거에서 지더라도 대선만 이기면 절반의 권력으로도 온 나라를 흔들 수 있는 것이 한국의 대통령제다. 정권이 선뜻 대안을 찾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지.

이 정권에서 이념 때문에 서로 갈라서고 반목하고 능멸한 상처로 모두가 고통스럽다. 그래서 다음에는 관용과 통합을 바라는 이가 많다.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라면 통합의 가치를 이끌어야 할 공영방송에 정 씨는 맞지 않는다. 그의 칼럼 제목대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