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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 칼럼]삶의 시간, 역사의 시간

입력 | 2006-09-20 20:15:00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보다 이미 살아온 시간이 훨씬 길다는 것인가. 삶의 희망보다 삶의 기억이 많은 노인의 존재는 더욱 많은 시간을 앞으로 살아갈 젊은이 눈엔 측은한 인생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도 있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선 ‘오늘’을 향유하는 삶의 시간에서 노인은 젊은이보다 행복할 수가 있다. 어제의 기억이 빈약한 젊은이에게 오늘 누리는 모든 것은 처음부터 자명한 것처럼 주어진 것으로 별로 신명 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에겐 지금 여기 일상적으로 주어진 많은 것이 예전에는 꿈에서나 그려 보던 소중한 것이요, 우리가 오늘 누리는 많은 것이 지난날에 힘겹게 이룩한 ‘성취’로 느껴져 대견하기만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산 세대에겐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로 살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감격스러울 때가 많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살아 온 세대에겐 산업화 이후 우리가 누리는 의식주 생활 모두가 보람 있는 성취 아닌 것이 없다. 그런 것보다도 더욱 젊은이들의 눈엔 띄지 않고 늙은이만이 보고 느끼고 감복할 수 있는 변화로 우리(남한) 산야(山野)의 자연이 있다.

집집마다 연료로 장작을 때던 일제강점기에 우리 주변의 산은 나무가 없어 벌거숭이였다. 게다가 6·25전쟁은 이 벌거벗은 민둥산을 폭탄과 포탄으로 온통 곰보딱지로 만들어 버렸다. 피란 수도로 옮긴 대학에 가기 위해 대전에서 부산으로 가는 차창 밖으로 본 그것이 1950년대 우리의 국토요, 우리의 자연이었다. 한국의 산야가 지금은 울창한 나무숲으로 파래져 있다. 우리는 그걸 몰랐지만 20여 년 만에 한국을 찾은 6·25 참전 외국 군인이 보고 놀라서 맨 먼저 우리를 깨우쳐 줬다.

산업화를 추진하고 민주화를 쟁취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우리 당대에 이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허허벌판에 나무를 심어 이 땅의 자연이 녹음으로 뒤덮이리라는 것은 꿈은 꾸어도 우리 당대에 이뤄지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산업화는 ‘압축 성장’으로, 민주화는 급격한 혁명으로 가능하지만 자연의 녹화는 그러한 속성(速成) 수단이 통하지 않는다.

나무는 압축 성장할 수 없고 산야는 혁명적 수단으로 속성 녹화될 수 없다. 살아 있는 한 나무가 자라기 위해선 나무가 사는 삶의 시간이 필요하고 한 나라의 자연이 녹화되기 위해선 긴 역사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의 시간으로 이미 역사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면 주제넘은 말이 될까. 가령 영국의 앨런 불럭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을 보고 20세기의 문양을 이루고 있던 가장 큰 두 매듭이 풀어져 버렸다고 술회한 일이 있다. 히틀러 독일의 제3제국과 스탈린의 소비에트제국.

그러나 ‘천년제국’을 노래한 제3제국은 닭띠(1933년·계유·癸酉)에서 닭띠(1945년·을유·乙酉)로 겨우 12년 지지(地支)의 한 바퀴를 돌고 몰락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제3제국의 전 역사시간이 내 삶의 시간의 극히 짧은 한 토막밖에 되지 않는다. 인류사 발전의 미래를 독점한 듯한 사회주의 소비에트제국의 전 역사시간(1917∼1990년)도 따지고 보니 겨우 내가 살아 온 삶의 시간에 불과하다. 한국을 병탄하고 아시아 전역에 침략전쟁의 재난을 몰고 왔던 대일본제국의 역사시간(1868∼1945년)도 소비에트제국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독일인의 삶은 제3제국의 12년 역사의 교훈에서 크게 배우고 있다. 그에 비해 일본인은 대일본제국의 역사시간을 다시 한번 살아 보자 꿈틀대는 것일까. 옛 소비에트제국의 주민들이 그들의 지난 역사시간에 넌더리를 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 한국인은? 대한민국의 역사시간도 이제 곧 갑년(甲年)을 맞는다. 그것은 여러모로 성취와 발전과 보람의 역사라 해서 좋을 것이다. 한 가지를 빼놓고는…바로 60년 헌정사에서 단 한 번도 성공한 사례가 없는 대통령제라는 권력구조 말이다.

역사의 시간을 모르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삶의 시간에 실패가 뻔한 권력구조로 다시 또 한 차례 역사시간을 반복하려 할 것인가.

최정호 울산대석좌교수·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