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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 말소는 편집국의 집단 거사” 의거 70주년

입력 | 2006-08-25 03:00:00

1936년 8월 13일 신문 말소 흔적1936년 8월 13일자 2면에 실린 ‘월계관 쓴 우리 손기정’. 손기정 선수 우승과 관련해 동아일보에 실린 첫 사진이다. 오른쪽에 있는 남승룡 선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에 비해 손 선수의 일장기는 유독 하얗게 지워져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70년 전 바로 오늘이었다.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해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 선수의 사진이 실렸다. 사진 속 손 선수의 유니폼에는 국적을 표시하는 일장기가 삭제돼 있었다. 흰색 물감으로 교묘하게 지운 것이 아니라 사진 제판 과정에서 검게 지운 흔적까지 의도적으로 남겨놓은 대담한 일장기 말소 의거였다. 당시 의거에 참여한 기자들의 수기와 일제 총독부가 남긴 문서를 통해 그때의 진상을 되돌아본다.》

○ 일장기 말소의 주역은 누구였나

“세상이 알기는 백림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 사건이 이길용이 꾸민 짓으로만 알고 있다. 무리도 아니다.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1948년 발행된 ‘신문기자 수첩’에 실린 이길용 기자의 수기)

일장기 말소는 개인적인 의거였는가. 편집국원 상당수가 참여한 집단적 거사였는가. 당시 사건의 전말은 수사 주체였던 경기도 경찰부장이 1936년 8월 27일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앞으로 보낸 비밀정보보고 문서인 ‘소화 11년 경찰정보철’에서 자세히 드러난다.

“이길용은 조사부원 이상범에게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24일자 석간에 실으려 하는데 흉부의 일장기를 흐릿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상범은 이를 승낙하고 원화에 착색한 뒤 사진부 과장 신낙균의 책상 위에 갖다 놓았다. 그런 후에 사회부 기자 장용서가 24일 오후 2시 반경 사진부실에 와서 사진과장 신낙균과 사진부원 서영호에게 ‘이상범이 지우기는 했으나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해 동판에 현출된 사진 중 일장기 부분에 청산가리 농액을 사용해 말소한 뒤 인쇄부로 넘겨 다음 날 석간에 게재한 것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1차로 이상범 화백이 물감으로 일장기를 지웠으나 그 흔적이 남아 있자, 2차로 동판에 현출된 사진에 청산가리 농액을 사용해 말소한 것이다. 사회부, 사진부, 편집부, 인쇄부의 협조 없이 일개 기자나 부서에서 이뤄질 수 없는 편집국 차원의 집단적 거사였다. 일제는 경찰 조서에 각 부서 기자들이 어떻게 일장기 말소사건에 협조했는지 ‘계통도’까지 그려 놓았다.

일제 경찰은 조서에서 “그들이 항상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민족적 의식에 근거한 증오심 때문에 그 같은 일을 저지른 것으로 판명됐다”고 결론지었다.

○ 기자는 물론 경영진까지 축출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된 8명의 기자 중 사건의 직접 책임자로 인정된 이길용(운동부 주임), 현진건(사회부장), 최승만(잡지부장), 신낙균(사진과장), 서영호(사진부원) 등 5명은 40일간에 걸쳐 심한 고문을 받았다. 석방될 때는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 안 할 것’이라는 서약서에 강제로 서명해야 했다.

또한 일제는 취체역(지금의 주식회사 이사)인 인촌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 영업국장 양원모 등 회사 주요 경영진도 전원 축출했다. 총독부는 주주총회에서 인촌과 송진우가 취체역을 인책사임하고, 인촌이 주식을 신임 백관수 사장에게 양도한 후인 의거 11개월 만에 동아일보에 대한 발행정지를 해제했다.

1937년 6월 11일 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비밀문서 ‘동아일보 발행정지처분 해제에 이르는 경과에 관한 건’은 “당국이 부적절하다고 인정하는 간부와 사원, 그리고 사건 책임자를 퇴출하고 동아일보의 다른 직무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요구했으며 ‘사직자에 대한 보고서’의 제출 기한을 1937년 5월 18일로 못 박았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일장기 말소 의거’를 둘러싼 폄훼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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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해 일각에서는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한 일장기 말소 사건을 모방한 것” “경영진은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해 노여워하고 개탄했다”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그 진실을 짚어 본다.

○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는 언제 시작됐나

최인진 한국사진사연구소장은 최근 펴낸 저서 ‘손기정 남승룡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다’(신구문화사)에서 “동아일보가 손기정 일장기를 처음 말소한 날은 8월 25일자가 아니라, 조선중앙일보와 같은 8월 13일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동아일보 13일자 2면에 게재된 사진을 정밀 분석한 결과 “사진 상태가 아무리 안 좋아도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나타나는 일장기 표장은 보이기 마련인데, 8월 13일자 사진은 고의로 일장기 표지를 지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길용 기자도 자필 수기에서 “일제강점기 때 신문의 일장기 사진 말소는 항다반(恒茶飯·차를 마시는 일처럼 흔한 일)으로 부지기수였다”고 회고했다.

일본의 스포츠평론가 가마다 다다요시(鎌田忠良) 씨는 저서 ‘일장기와 마라톤-베를린 올림픽의 손기정’에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도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 인촌 김성수전의 일부만 거두절미한 인용

인촌 김성수가 일장기 말소 의거를 전해 듣고 개탄했다는 주장은 1976년 인촌기념회가 발간한 ‘인촌 김성수전’의 내용 일부만 거두절미해 인용한 데서 비롯됐다. 이 책은 인촌이 의거를 전해 듣고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 버리는 데서 오는 순간의 쾌(快)와 동아일보가 정간되거나 영영 문을 닫게 되는 데서 오는 실(失)을 생각하면 그 답은 분명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인촌은 도중에 문제의 신문을 구해서 그 사진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민족의 정기가 위축되어만 가고 변절하는 유명무명의 군상이 늘어가는 세태로 볼 때, 일장기의 말소는 잠자려는 민족의식을 흔들어 놓은 경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에 대한 탄압은 민족 대표지로서 쾌히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되기도 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편 일각에서는 “동아일보는 기자를 해고했기 때문에 무기정간에 그쳤고, 조선중앙일보는 기자 해고를 거부했기 때문에 강제 폐간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진석(언론사)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은 당초 총독부가 모르고 넘어갔다가 동아일보 말소 사건을 조사하던 중 뒤늦게 밝혀졌다”며 “조선중앙일보는 동아일보가 문제가 되자 9월 5일자에 ‘자진 휴간’ 사고를 냈으며, 이후 경영난으로 복간을 못 해 폐간된 것”이라고 밝혔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