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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옹 “정권 입맛따라 헌법을 누더기 만들면 안돼”

입력 | 2006-07-15 03:00:00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 공포한 제헌 국회의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김인식 옹이 14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제헌회관 사무실에서 동료 제헌의원들과 기념 촬영한 사진을 가리키며 건국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월드컵 축구 때 전 국민이 다함께 ‘대∼한민국’을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몰라.”

제헌동지회 회장인 김인식(93) 옹은 14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제헌회관에서 제헌의원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깊은 회상에 잠겼다.

김 옹은 현재 생존해 있는 유일한 제헌국회의원. 209명의 제헌의원 가운데 10명은 6·25전쟁 중 학살됐고, 51명은 납북됐다. 2004년 정준 제헌의원이 노환으로 별세하면서 김 옹은 2년째 홀로 제헌절을 맞고 있다.

58년 전인 1948년 5월 10일 황해도 해주시 옹진을 선거구에서 당선된 그는 “제헌의회에서 국호를 어떻게 지을지를 놓고 여러 의견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 ‘태한’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임시정부에서 사용했던 ‘대한’이 가장 전통성이 있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한 거야.”

그는 “제헌의원들은 설렁탕만 먹어 가며 법안을 놓고 열심히 토론했는데 요즘 의원들은 멋만 내려 한다”며 후배 정치인들을 나무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의원에게 적산(敵産) 가옥을 한 채씩 나눠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제헌의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국민도 집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만 집을 갖느냐’며 거절했지.”

그는 “요즘 여야가 싸우는 것을 보면 국정을 위한 것보다 자기 당을 위한 게 대부분”이라며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소속 당을 위해서만 싸우면 국가가 바로 서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헌의회에서 ‘친일파 숙청에 관한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과거사 청산작업에 대해 “당사자들이 대부분 숨진 마당에 친일 인사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국가보안법을 발의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국보법을 유지해야 한다”며 “반국가적 행동을 한 사람은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국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사립학교법과 과거사법에 대해 김 옹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며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 일부에서 제기되는 개헌론과 관련해서는 “제헌의원들은 세계 각국의 헌법을 모두 들여다보며 장점만을 취합했다”며 “역대 정권에서 자기들 입맛대로 헌법을 9번이나 뜯어고치면서 누더기를 만들었다”고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김 옹은 16세 때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해주고보에서 쫓겨나 동료 12명과 함께 해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재입학을 허락하지 않자 중국 만주학교를 거쳐 만주사변 이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대학 졸업 뒤 고향인 해주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가만히 있어도 인텔리들이 스스로 찾아 읽는 대단한 신문이었어. 특히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소사건 때는 국민들의 반향이 엄청났어.”

김 옹은 “난 젊은이들을 만나는 게 좋아. 만약 내년 제헌절 때도 내가 살아 있으면 그땐 점심이나 함께하자”며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