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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동안 분쟁지역 찍은 성남훈씨 ‘유민의 땅’ 사진전

입력 | 2006-03-08 03:05:00

코소보의 난민촌에 수용된 손자를 찾아 반갑게 키스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성남훈 씨의 작품.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성 씨는 15년간 세계의 분쟁지역과 소외지역을 다니며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펴내고 사진전을 연다. 사진 제공 눈빛


열 살을 좀 넘겼을까. 아프가니스탄 소녀는 머리에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손엔 등불을 들고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다. 할아버지 댁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빌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 밤엔 가족들과 따뜻한 식탁 앞에 둘러앉을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사진가 성남훈(43·사진) 씨의 사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끝없이 이어진 코소보의 천막촌 앞에서 우는 할머니, 콩나물시루 같은 기차에 실려 가는 르완다 난민들, 쓰레기 더미 옆에서 먹고 자는 인도네시아 빈민들, 추위를 피해 도시의 맨홀 속에 사는 몽골 아이들, 포탄 옆에서 노는 맨발의 보스니아 아이들…. 그의 사진 속에 담긴 휴먼 드라마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 어떤 울림을 전해 준다.

수줍은 듯 미소를 짓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소녀. 사진집 ‘유민의 땅’의 표지 사진이다(사진 위). 프랑스에서 소수 인종으로 차별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루마니아의 집시들. 사진 제공 눈빛

성 씨는 이 같은 사진을 찍기 위해 1991년부터 15년 동안 보스니아, 르완다, 이라크 등 20여 개국을 발로 뛰어다녔다. 모두 외부의 힘에 의해 뿌리 뽑힌 사람이나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사진이다. 이렇게 세계의 분쟁지역과 소외지역의 생생한 삶을 온몸으로 부딪쳐 가며 기록한 대장정이 마침내 사진집과 사진전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 최근 눈빛출판사에서 나온 사진집과 29일까지 경기 양평군의 사진갤러리 ‘와’(www.gallerywa.com)에서 열리는 사진전의 제목은 ‘유민의 땅(The unrooted)’. 사진 속 주인공들은 어쩔 수 없이 부초처럼 떠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 씨는 “작업하면서 단 한순간도 인간과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지 않은 적이 없다”며 “사진집과 사진전은 이민자든, 난민이든, 유민이든 타의에 의해 제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보여 주고자 했던 내 성찰의 기록”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도 이제 한국인의 눈으로 세계를 해석한 다큐 사진집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 그의 사진작업의 의미는 각별하다.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1990년 파리로 건너가 뒤늦게 사진 공부를 시작했다. 늦은 만큼 남보다 끈질긴 집중력으로 파고들었다. 덕분에 1992년 프랑스에서 소수 인종으로 차별 속에 살아가는 집시의 삶을 기록한 ‘루마니아 집시’로 프랑스 파리의 ‘르살롱’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1994년 다큐멘터리 집단인 프랑스의 사진에이전시 ‘라포’ 소속 사진가로 보스니아 내전 등을 취재했고 1997년 귀국한 뒤엔 라포 한국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에티오피아의 기아 현장, 전쟁 속의 이라크, 인도네시아의 지진해일(쓰나미) 참사 등을 취재했다. ‘타임’ ‘르몽드’ 등 세계 유수 잡지와 신문에 그의 사진이 실렸다.

이훈구 기자

뉴스를 접하는 것과 직접 현장에서 사람들의 뼈아픈 고통을 목격하는 일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 씨는 “르완다에 갔을 때 만난 어린이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 가며 내는 신음소리, 그들의 공포 어린 눈동자는 결코 잊을 수 없다”며 “힘들 때마다 사진이 도대체 무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도 들지만 누군가는 이들의 삶을 기록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야만 한다는 생각에 다시 카메라를 들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값싼 동정을 끌어내기 위한 과격한 앵글의 사용, 감정의 과대노출을 자제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들은 차분하고 정직하다. 그 대신 고난과 궁핍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일상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을 보여 준다.

그는 “돌아보니 능력보다 담론이 컸다”며 “처음 계획했던 10년에서 5년이 더 늘었지만 내 사진이 그늘진 삶의 가장자리를 비추는 사진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