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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윤병철]글로벌 스탠더드, 이젠 생존의 문제

입력 | 2005-12-23 03:04:00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종은 끝내 사라진다는 자연도태는 생태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 필요한 제도와 시스템에도 자연도태의 법칙이 통한다. 환경이 바뀌면 사회 제도는 진화하거나, 전혀 새로운 제도를 낳는다.

글로벌 스탠더드도 환경 변화의 산물이다. 기업 활동 및 소비시장의 세계화와 함께 자본 이동에 국경이 없어지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라마다 다른 자국형 기준을 사용하면 국가 간의 자유로운 교류가 제약되는 것은 물론 이해 상충과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일단 세계화된 시장이 형성되면 모든 나라가 수용하는 기준을 지키지 못하는 기업은 시장의 외면으로 퇴출될 수밖에 없으므로 생존을 위해서도 국제 표준을 준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 사회도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고, 많은 분야에서 국제 표준에 맞춰 국내 기준을 조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분야가 많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반대하는 폭력 시위를 벌인 한국인들이 홍콩 당국의 사법 처리를 받게 된 사건은 한국에선 용납되는 것이라 해도 국제 사회에선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사례이다. 우리 기준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훗날 비싼 대가를 치를 수도 있는 다른 일은 없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경제 분야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다른 분야보다 다소 앞서 있다. 그렇지만 외국인들은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와 사회 기여 관행에 대해서는 문제의 소지가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 특히 계열 기업 간에 돌아가며 출자해서 적은 지분으로 전체 기업을 조종하고 기업의 지배 영역을 무한히 확장해 나가는 순환출자 관행은 재검토해 봐야 한다. 개별 기업의 정상적인 발전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기업에 출자한 주주들의 이해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기업지배 체제에선 지배주주가 기업을 개인의 소유물처럼 관리하고 운영함으로써 종종 비자금 조성 같은 비리가 발생하고, 그것이 반기업 정서의 커다란 씨앗이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업이 사회를 위해 기부나 출연을 하면서 마치 그룹 회장 개인이 하는 것처럼 생색을 내고 있고, 그런 관행이 통하고 있는 것도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거리가 있다. 기업의 사회 공헌에 관한 국제 포럼에서 국내의 모 그룹이 자신들의 활동을 자랑하다가 당황해한 적이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외국인에게서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기부하는데 주주들이 가만히 있더냐”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설적인 투자가 워런 버핏은 “기업의 사회 공헌은 절실한 것이지만 기업 이익은 주주의 것임을 분명히 하고 그 집행도 주주의 의견을 묻고 그에 따른다”고 했다. 주주 중시 경영은 이 정도 돼야 제대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더 과격한 주주 중심주의자들은 “기부는 주주의 돈이 아니라 기업 회장의 개인 돈으로 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엔 지금 부의 양극화, 부자에 대한 공격이 민감한 이슈가 돼 있다. 선진국에도 그런 갈등이 있었다. 그들은 기업 자체의 사회 공헌은 물론이고 기업주가 개인 재산을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유감없이 나눔으로써 이를 극복해 왔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이 세계적 차원의 기부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사회적 기여엔 주주의 돈을 사용하고 정작 자신은 온갖 절세 수단을 활용해 자식들에게 기업과 자신의 사유재산을 물려주는 데 골몰한다면, 과연 그런 부자가 존경받을 수 있겠는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경영은 오늘날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국제 표준이 돼 있다. 기업이 이윤만 추구하면 법적인 규제나 소비자의 반발을 불러 결국 힘을 잃기 때문에 이윤 추구와 윤리성을 통합한 경영만이 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경주의 최 부자가 “주변 100리 이내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가훈을 남긴 것도 먼 훗날까지를 내다본 것이다.

마당을 쓸면 내 집만 즐겁지만 골목을 쓸면 온 동네가 즐거워진다. 지속 가능한 번영을 생각하는 기업이나 부자라면 모름지기 그 기준이 온 동네를 생각하는 것이어야 한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