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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귀 못알아듣는 국정홍보처

입력 | 2005-10-25 03:16:00


국정홍보처는 최근 홈페이지에서 ‘심히 우려되는 조중동의 기억상실증’이란 글을 싣고 “과거 불구속 원칙을 지지한 일부 언론이 천정배(千正培)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을 비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정홍보처는 본보를 비롯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과거 사설을 예로 들며 “언론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불구속 원칙에 대한 말 바꾸기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본질을 호도한 것이다.

첫째, 국정홍보처는 본보가 2월 14일자 사설에서 중국산 인삼을 국산으로 속여 판 상인 17명 가운데 13명의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이는 검찰총장에 대한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안이었다.

본보가 천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과 관련해 최근 지적한 것은 △검찰에 대한 정치권의 개입과 △수사지휘권 발동이 검찰 중립성 확보라는 당초 취지에 맞지 않게 발동된 점 △불구속 수사 원칙 적용의 형평성 문제 △일본에서도 수사지휘권 발동이 한 번뿐이었으나 이를 둘러싼 진통이 있었던 전례 등이었다.

둘째, 무엇보다 강정구(姜禎求) 교수 구하기에 나선 듯한 여권의 행태가 문제였다. 열린우리당 문희상(文喜相) 의장은 10일 “강 교수의 사법처리는 신중히 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고, 청와대도 비슷한 시점에 같은 의견을 검찰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검찰에 수사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셋째, 이 같은 상태에서 천 장관이 12일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것은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검찰의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법무부 장관에게 수사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검찰청법의 취지와는 상반되는 조치였다. 검찰권이 부당하게 행사된 것이 아님에도 천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것에 대해 검찰 내부에서도 반발이 컸다.

일본에서도 1954년 법무상(법무장관)이 일본 검사총장(검찰총장)에게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다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이후로는 다시는 수사지휘권이 발동되지 않았고 일본의 법무상들은 취임 시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지 않겠다는 것을 다짐해 왔다.

넷째, 천 장관이 수많은 사건 중 왜 하필이면 강 교수 사건에 대해 불구속 수사를 지휘했는가도 논란이다. 강 교수가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어 불구속했다는 주장은 사안이 중대할 경우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와 관계없이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했던 것과 비교할 때 설득력을 잃는다.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각종 여론 조사에서도 천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에 대해선 반대하는 여론이 찬성 여론보다 높게 나오고 있다.

다섯째, 천 장관과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 등은 1996년 ‘구체적 사건에 대한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수사지휘권 폐지’를 요구하는 검찰청법 개정안을 공동 발의했던 적이 있다. 천 장관 등도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에 따르는 문제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여권 인사들이야말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