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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허엽]조기숙 수석께 묻습니다

입력 | 2005-09-09 03:39:00


뵌 적이 없습니다만, 묻고 싶은 게 있어 이 글을 드립니다.

최근 조기숙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의 말과 글을 듣고 보면 ‘지식인의 전향’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적어도 국민과 민심을 보는 눈이 그렇습니다. 왜일까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전향’의 뜻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일본의 지식인 쓰루미 온스케 씨에 따르면 전향은 개인(집단)의 자발적 사상 변화와 국가에 의한 강제적 사상 변화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한국에서 사상 문제로 탄압받았던 이들에게는 몸서리나는 말이지만, 저는 이 말의 원뜻인 ‘방향 전환’이라는 의미로 쓰겠습니다.

조 수석은 지난달 한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21세기에 가 계시고 국민은 아직 독재 시대 문화에 빠져 있다”고 했습니다. 비판이 거세지자 7일 ‘언론 보도에 대해 드리는 글’에서 “문제 발언보다 문제 보도가 더 큰 문제”라며 “전체 맥락과 무관하게 한 문장을 잘라 문제를 삼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조 수석은 ‘청와대 칼럼’이나 TV 토론에서 국민의 여론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판 과잉에서 비판+대안으로’라는 칼럼에서 “의견은 다른 사람에게 무슨 말을 듣느냐에 영향을 받는다”며 “국민의 여론이 참여정부의 객관적 성적표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MBC ‘100분 토론’에서도 “국민이 제대로 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조 수석이 수년 전 이화여대 교수 시절 동아일보에 기고한 칼럼들을 읽어 봤습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대통령의 리더십이 문제다), 노무현 후보에 대한 기대(3김 정치 못 벗어나는가) 등에 대해 쓰셨습니다.

이 중 대선을 앞둔 2002년 12월 11일자에 실린 ‘정치와 국민 수준’이라는 칼럼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나라가 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라를 지켜온 사람은 지도자가 아닌 민초들이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중요한 선거마다 민심이 현명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칼럼 ‘정치 룸펜 없애야 정치 산다’(2002년 7월)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례를 들며 “선거 때만 되면 대통령은 탈당을 하고 정당은 이름을 바꾸지만 유권자는 그런 잔꾀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2년 반 전 조 수석은 국민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 국민이 지금은 어떻기에 상반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요.

대중 사회를 주도하는 여론의 가변성은 우리 사회의 과제입니다. 여론보다 공론으로 이뤄지는 ‘숙의(熟議·deliberative) 민주주의’의 길을 찾는 이들도 많습니다.

조 수석은 이 과정에서 언론이 공론의 장을 형성하지 못한다며 탓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지만, 신문은 독자가 가장 무섭습니다. 현 정권과 친여 매체의 비난에도 꿋꿋하게 제 길을 가는 신문들은 독자들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쓰루미 씨는 전향을 배반으로 간주하지 말고 이유와 정당성을 짚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민과 언론을 단선적으로 가르는 우리 현실에선 새겨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조 수석의 ‘방향 전환’은 어떤 이유와 정당성이 있는지요.

허엽 위크엔드팀장 h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