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넘치는 달러… 해외서 펑펑 써야 애국?

입력 | 2005-05-27 03:05:00


《“능력만 있다면 해외에서 달러를 많이 쓰는 게 애국 아닌가요?” 1년에 서너 차례 해외로 골프 투어를 가는 곽모(40·개인사업) 씨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서울 외환시장은 만성적인 달러 공급 초과 상태다. 자연히 달러당 원화 환율은 하락(원화 가치 상승) 추세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이렇듯 달러가 넘쳐 나다보니 곽 씨의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해외 소비지출은 물론 해외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에 대한 투자가 최근 급증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와 외환 당국은 해외 투자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본다.》

○해외로, 해외로…

26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1분기(1∼3월) 내국인이 해외여행 경비로 쓴 돈은 지난해 1분기보다 22.8% 많은 25억8370만 달러. 같은 기간 유학 연수비로 쓴 외화도 7억5430만 달러로 36.7% 늘었다.

해외투자 증가세는 더 가파르다. 작년 말 현재 해외 유가증권(주식 및 채권) 투자 잔액은 283억7000만 달러. 1년 전보다 110억3000만 달러(63.6%) 늘었다.

증가분의 62.6%인 69억1000만 달러를 개인 및 기업이 투자했다. 특히 주식 투자가 크게 늘었다. 이런 현상은 올해도 계속돼 1분기 외화증권 투자는 33억 달러 증가했다.

직접투자도 급증하는 추세다. 해외 직접투자는 2001년 18억1065만 달러였지만 작년에는 50억9173만 달러나 됐다. 신고된 것만 집계한 것이어서 ‘환치기’ 등을 통해 불법적으로 빠져나간 금액을 합하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외 부동산에 투자하는 펀드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달러 내보내기 작전’ 나선 외환 당국

해외 투자와 해외 소비가 늘어나고 있는데도 정부는 문을 더 활짝 열 방침이다. 해외 투자 절차를 간소화하고 기업 및 금융회사, 나아가 개인의 해외 부동산 투자 제한을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넘치는 달러화 공급을 당국의 매수 개입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박승(朴昇)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한미 간 금리가 역전돼 자본이 대거 유출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일부 유출이 일어나더라도 환율 안정에 도움이 된다면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해외 투자 제대로 되나

외환위기 직전에도 해외 투자는 크게 늘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1997년 한국투신과 대한투신 등 5개 투신사는 해외 펀드를 만들어 동남아시아에 투자했다.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원금의 2배 이상을 해외에서 빌렸다가 태국 밧화 폭락으로 거액의 손실을 봤다.

1996년 3월 3000만 달러에 불과했던 러시아 투자는 이듬해 6월 18억 달러로 늘었다. 러시아 펀드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처럼 보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1998년 8월 모라토리엄(외채 지불유예)을 선언했다.

지금은 나아졌을까.

투신업계에 따르면 자산운용사들의 투자 방식은 대부분 간접투자다. 직접투자를 하고 싶어도 사람이 없어서 못 한다. 7000억 원 이상을 해외에 투자하는 한 투신사는 리서치와 투자 판단을 단 3명이 한다. 인력이 가장 많은 삼성투신운용도 해외 투자 인력은 10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간접투자도 안전하지만은 않다. 해외에서 운용하는 펀드에 자금을 투자하는 방식인 ‘펀드 오브 펀드’는 수만 개의 외국 펀드 가운데 제대로 된 것을 고르는 것이 관건이다. ○“해외 투자 위험 관리 감독 강화해야”

펀드평가회사인 제로인 조사분석팀 손승완 과장은 “모처럼 살아난 해외 투자 펀드가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려면 투신사가 하루 빨리 고급 인력을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해외 투자가 늘어나는 현상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한국금융연구원 신용상 연구위원은 “해외 투자는 외환시장의 수급 불균형 해소는 물론 돈을 장기로 굴려야 하는 연기금이나 보험사가 자산과 부채의 만기를 맞추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급격한 투자자금 유출은 금리 급등, 주가 폭락을 부를 수도 있으므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LG경제연구원 조영무 선임연구원은 “금융회사의 해외 투자 관련 위험을 체계적으로 관리 감독하고 국내 장기 채권시장을 활성화하는 등 다각적인 정책 수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