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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댓 클래식]브루크너 교향곡 흐르는 ‘불멸의 이순신’

입력 | 2005-05-25 03:32:00


올해 예술의 전당 교향악 축제는 31일 원로 지휘자 정재동 씨가 지휘하는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로 막을 올린다. 이날 무대의 메인 프로그램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E장조. 정 씨에게 이 곡을 택한 이유를 물었다. “1980년대에 즐겨 지휘했던 곡이죠. 물론 내가 사랑하는 작품이고.” 짤막하게 이유를 밝힌 그는 미소를 띠며 “요즘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TV 드라마에 이 곡의 2악장 아다지오가 나옵디다”라고 덧붙였다.

평소 볼 기회가 없었던 드라마였다. 인터넷 주문형 비디오 서비스(VOD)로 지난 회를 재생시켜 보았다. 충무공이 고뇌에 빠질 때마다 2악장 아다지오의 장엄한 서두 부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톤 브루크너(1824∼1896)의 교향곡 7번은 작곡자가 평소 경애해 마지않던 선배 작곡가 바그너의 부음을 듣고 쓴 작품이다. 특히 2악장 아다지오는 영웅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는 듯한 장엄한 악상(樂想)으로 가득 차있다. 비극성을 내재한 영웅과 그 ‘불멸’을 기리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작품인 것이다.

썩 유쾌하지는 않은 사실이지만, 이 작품은 세계사의 중요한 장면에 잠시 등장한다. 1945년 5월 초(날짜는 분명치 않다), 영국 정보 전문가들은 제3제국의 국영 라디오가 갑자기 정규방송을 멈추고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의 장엄한 아다지오를 흘려보내는 데 주목했다. 곧 되니츠 제독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히틀러 총통이 사망했으며 유언에 의해 자신이 총통 직을 승계한다는 내용이었다.

왜 이 작품이었을까. 제3제국의 방송 관계자가 ‘영웅’의 최후라는 상징성을 이 작품을 통해 나타내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 브루크너는 히틀러와 뗄 수 없는 연관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오스트리아의 린츠 근교에서 태어났다. 바그너를 더할 나위 없이 경모했다는 점도 공통된다. 제3제국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바그너의 악극 못지않은 애호 레퍼토리였다.

오해는 없길 바란다. 브루크너는 히틀러가 일곱 살 때 죽었으므로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다.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에 만연했던 반(反)유대주의도 브루크너와는 상관이 없었다. 브루크너는 유대인이었던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 교향악의 구조에 대해 깊은 영감을 제공했다.

독일의 역사학자 요아힘 페스트는 문호 토마스 만의 말을 빌려 “독일 민족은 ‘비극성’이라는 개념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히틀러 역시 브루크너의 작품에 담긴 비극성에 경도됐지만 이를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으로 소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