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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V 개발 살아있는 역사’ 쌍용차 최형탁 상무

입력 | 2005-05-12 03:08:00

무쏘 체어맨 렉스턴 등을 개발한 쌍용차 종합연구소의 최형탁 부소장. 26년간 자동차를 설계해온 그는 쌍용차 출범 초기부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개발을 주도해 ‘SUV 개발의 산 역사’로 불린다. 평택=박중현 기자


“자동차 설계 외길을 26년간 걸어왔습니다. 격동기를 거치면서 소속만 쌍용그룹, 대우그룹을 거쳐 중국의 상하이(上海)자동차그룹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쌍용차 종합기술연구소 최형탁(崔馨鐸·48·상무) 부소장은 자동차 업계에서 ‘한국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개발의 산 역사’로 불린다. 무쏘, 렉스턴, 로디우스 등 한국을 대표하는 SUV 차량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개발됐기 때문.

1979년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던 그는 과장급이던 1988년 쌍용그룹이 동아자동차와 ㈜거화를 인수해 만든 ‘쌍용자동차’로 스카우트됐다.

쌍용차는 당시로서는 한국에서 생소한 개념이던 SUV를 독자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엔진이었다. 한국에는 SUV용 디젤엔진을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것.

“일본 프랑스 미국 독일 등의 업체에 디젤엔진 기술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뜻밖에 해외업체와 기술공유를 하지 않던 메르세데스벤츠가 1991년 기술제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SUV개발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죠.”

1993년 벤츠엔진을 얹은 ‘무쏘’가 첫선을 보였고 이듬해에는 경남 창원공장에서 디젤엔진이 양산돼 무쏘는 100% 자체 생산한 한국 최초의 SUV가 됐다. 출고를 6개월씩 기다려야 할 만큼 무쏘의 인기는 높았고 이어서 벤츠와 협력해 개발한 승합차 ‘이스타나’는 중국 러시아 등에서 벤츠 브랜드로 비싼 값에 팔렸다.

자신감을 얻은 쌍용차는 ‘종합 자동차메이커’로 발돋움하기 위해 최고급 대형승용차 개발을 최 상무에게 맡겼다. 드디어 1997년 10월 고급 대형차 ‘체어맨’이 첫선을 보였다.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시기였습니다. 외환위기가 그렇게 임박한 줄 몰랐죠. 막대한 투자를 했던 쌍용그룹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1998년 1월 회사를 대우그룹에 넘겼습니다.”

하지만 ‘독자기술 개발’을 추구해 온 쌍용차와 “기술은 사서 쓰면 된다”는 대우그룹 사이에는 ‘자동차 철학’의 차이가 컸다. 쌍용그룹 시절 1250여 명이던 연구원 수는 1999년 12월 대우그룹 해체로 워크아웃이 될 때 560명으로 줄어 있었다.

“은행이 입출금을 철저히 관리하면서 자동차 개발이 불가능했습니다. ‘자동차 업체의 가치는 신차(新車) 개발에 있다’고 채권단에 역설해 간신히 1500억 원을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돈으로 개발한 차가 2001년 9월 첫선을 보인 ‘렉스턴’. 이 차는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디자인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쌍용차를 흑자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쌍용차의 ‘몸값’이 올라가면서 해외매각이 추진됐다. 결국 상하이자동차그룹은 같은 중국의 란싱그룹과 경합한 끝에 2004년 10월 쌍용차의 지분 48.9%를 인수했고 쌍용차는 이 그룹 산하의 9번째 완성차 업체가 됐다.

126개 계열사를 거느린 상하이자동차그룹은 쌍용차를 인수하면서 높은 연구개발 능력을 인정해 연구시설을 계속 한국에 존속시키기로 약속했다. 지난달 열린 상하이모터쇼에서는 그룹을 대표하는 ‘언베일링 제품’(쇼를 시작하면서 장막을 걷어내며 소개하는 제품)으로 쌍용차의 콘셉트카 ‘라오켄’을 선정해 기술력에 대한 신뢰를 표했다.

“독자기술 개발에 바친 젊은 날을 생각하면 중국 기업에서 차를 개발한다는 게 조금은 어색합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한국 땅에서 한국 사람이 개발한 차가 세계 시장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면 더욱 더 열심히 새로운 차를 개발할 겁니다.”

평택=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