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애자들은 성욕이 전무한 자신을 감추고 ‘정상’으로 위장하거나 ‘정상’이 되려 애쓰지 말고, ‘무성애’도 성 정체성의 하나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사진가 백학림씨의 누드 연작 중 한 편.
이달 초 국가인권위원회에는 성매매특별법이 남성의 자유, 생존권, 행복추구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한 단체의 진정이 접수됐다. 성매매특별법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던 와중에 한 국회의원과 한 여성 법조인은 공식석상에서 “남성의 성욕 해소와 관련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배고픈 사tkwl람이 밥을 찾는 게 당연하듯 성욕은 본능이라는 통념, 그리고 본능의 발산을 그 방식과 관계없이 다른 인권 문제와 비슷한 선상에 놓고 바라보는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반면 해외에서는 이성애만이 당연시되었던 오래된 믿음을 동성애가 깨뜨렸듯 성욕이 없는 무성애자도 성 정체성의 한 형태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10여 년 전 게이 운동가들이 ‘이성애는 늘 정당한가’를 묻기 시작하며 세상을 바꿔놓았던 것처럼 무성애자들도 묻는다. 성욕은 과연 늘 정당한 것인가.
○ 무성애자들의 ‘커밍아웃’
최근 과학 잡지 ‘뉴 사이언티스트’에는 성인의 1%가 성적 욕구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무성애자라는 조사 결과가 실렸다.
캐나다 브록대의 앤서니 보게트 연구원이 영국인 1만8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1%가 “다른 사람에게 성적으로 전혀 끌려본 적이 없는” 무성애자로 나타났다는 것. 전 인구의 약 3%가 동성애자임을 감안하면 이 역시 무시하기 어려운 수치다.
한국에서는 어떤지 제대로 된 과학적 통계는 없다. 단, 인터넷 여성포털 사이트 ‘젝시인러브 (www.xyinlove.co.kr)’가 최근 ‘나의 성욕지수는?’을 주제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성적 욕구를 느껴본 적이 전혀 없고 섹스가 싫고 역겹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 508명 중 2% 였다. 간단한 약식설문을 일반화할 수 없지만, 성적 욕구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영국과 미국 일본 폴란드 등에서는 그 같은 무성애자를 존중하고 권리를 인정하자는 집단적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동성애자가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커밍아웃’을 통해 게이 권익운동을 했던 것처럼 인터넷에는 자신이 무성애자임을 밝힌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가 수십 개에 이르고 무성애자임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티셔츠, 배지, 머그컵, CD 등이 판매되고 있다.
2000년 ‘공식 무성애자 사회(The official asexual society)’를 창립한 제럴딘 레비는 가수 겸 원맨쇼를 하는 배우인 23세의 뉴질랜드 여성. 그는 사춘기 시절부터 성적 공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성적 접촉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겨워지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스스로를 ‘비정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는 양성애자로 알려진 데이비드 보위의 인터뷰를 읽으며 자신이 ‘비정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역시 무성애자인 친구와 섹스 없이 사랑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헤어진 뒤부터 무성애자의 권리를 공개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외의 무성애자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티셔츠, 배지 등을 통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낸다. 사진은 ‘공식 무성애자 사회’가 무성애자에게 가장 우호적인 발언을 하거나 배역을 맡은 인사로 꼽은 영국의 작가 겸 코미디언 스티븐 프라이(왼쪽)와 ‘미스터 빈’의 주연배우 로완 왓킨슨. 동아일보 자료사진
○ 무성애자들의 사랑
무성애자를 위한 단체인 ‘에이븐(AVEN·www.asexuality.org)’은 무성애자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별하려면 아래 세 항목을 고려해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성적 매력=무성애자는 남에게 강렬한 매력을 느껴도 이를 성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열망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볼 때 아름다운 미술작품, 노을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는 감정을 느낀다.
▽성적 자극=무성애자는 성적 자극을 받는 경우가 극도로 적거나 없다. 어떤 이들은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 스스로 쾌감을 얻기 위해 자위를 하기도 하지만 파트너가 있는 섹스에서는 성적 자극을 얻지 못한다.
▽관계=무성애자는 자신을 지지해줄 친구와 가족의 네트워크를 유지하지만 성적 파트너와만 배타적 관계를 맺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무성애자는 성적인 욕구가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에이븐’에서는 무성애자가 금욕주의자나 아직 짝을 만나지 못하고 성에 눈뜨지 못한 이성애자와 다르다고 설명한다. 불감증과도 다르다. 예컨대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고 성적 욕구를 느끼지만 섹스 자체가 즐겁지 않은 사람이라면 무성애자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무성애자에게 사랑의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레비씨는 “무성애자도 사랑에 빠진다. 단지 무성적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계속 그를 떠올리고, 같이 있고 싶은 마음도 강렬하다. 다만 성적인 공상 대신 따뜻한 포옹, 손을 잡고 숲을 산책하는 방식의 친밀함을 바랄 뿐이다.
이들은 “성은 가까운 관계에서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한 방법’이지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고 말한다. 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쾌감을 얻거나 감정을 표현하거나 자아를 고양시키는 등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성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는 다른 방법으로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에이븐’은 “현대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 성적 매력을 느껴야 하며, 그 성적 매력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하는지를 은연중에 규정한다”면서 “그런 사회 속에서 대다수의 무성애자는 자신을 위장하며 열등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