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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의원의 '나, 아버지, 과거사 그리고 국가정체성' 全文

입력 | 2004-09-07 19:30:00


안녕하십니까. 유시민입니다.

지난 주말 저는 가족사를 새로 ‘연구’했습니다. 일흔 다섯 되신 어머니와 여든이 넘으신 숙부에게, 그리고 어머니보다 더 연세가 많은 사촌누이에게도 전화를 했습니다. 왜냐구요? 송아무개라는 사람이 인터넷 〈브레이크뉴스〉에 저를 여러 가지로 비난하는 기사를 썼는데, 그 언론사 편집인이 그걸 탑에다 걸었기 때문입니다.

「유시민 의원 선친 일제하 교사, 백부는 면장」이라는 제법 자극적인 제목까지 달아서 말입니다.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우선 대략이라도 사실관계를 파악해 보았습니다. 문서나 다른 근거자료가 없으니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집안 어르신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공직자로서 가족사를 분명하게 정리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제 조상들은 안동군 풍산면 하회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영국 여왕이 방문한 적 있는 바로 그 하회마을입니다.

그래서 제 관향은 풍산(豊山) 또는 하회(河廻)라고 합니다. 조상들 가운데 제일 이름 높은 분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냈고 국난의 원인과 교훈을 정리한 『징비록』을 남긴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입니다. 저는 유성룡의 13대 손입니다. 탤런트 류시원 씨와 저는 14대조가 같습니다. 어른들의 말씀과 족보에 따르면 제 증조부께서 경주 최씨 집안에 장가를 들면서, 지금은 경주시에 편입된 월성군 내남면으로 옮기신 모양입니다.

저는 경주시내 북부동에서 6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제 선친(柳台佑)은 4남1녀의 네 번째이자 셋째 아들로 1920년에 태어나, 1982년 제가 군복무를 하던 시기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고통을 무척 많이 겪으며 산 분입니다.

선친이 세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막내 삼촌을 낳으신 직후였다고 합니다. 열 살 넘게 나이가 많은 고모님이 어린 두 동생을 키우느라 혼기를 놓치고, 그때로는 아주 늦은 나이에 시집을 가셨다고 합니다. 선친은 어린 시절 한쪽 눈의 시력을 잃으셨고, 평생 동안 심한 위장병에 시달리셨는데, 가난으로 인한 유아기의 영양실조와 질병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래서인지 돌아가신 고모님은 저를 친손자처럼 대하셨습니다. 제가 징역을 살 때는 눈물로 얼룩져 알아보기 어려운 ‘언문편지’를 보내셨고, 어쩌다 명절에 제가 찾아뵈면 맨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나오시곤 했습니다.

제 선친은 열세 살에 경주에 있는 소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어른들의 회고에 따르면 풀을 뜯기려고 소를 몰고 나갔다가 책을 읽느라 소를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대단한 책벌레이셨던 모양입니다.

남의 땅을 빌려 소작을 지으면서 소년기를 보내신 뒤, 일본으로 가 병원이나 약국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검정고시를 쳤고, 5년제 중학교의 야간부 3학년에 편입해서 다녔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디에 쓴 글에서 선친이 일본의 초급대학 같은 데를 다녔다고 쓴 적이 있는데, 확인해 보니 5년제 중학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중학교를 졸업하셨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선친은 한 쪽 눈의 시력이 없고 의료기관에서 일을 한 덕에 징용을 면하셨다고 합니다. 세 살 아래 막내 숙부는 징용되어 말레이시아 근처 섬까지 끌려갔다가 그야말로 천우신조로, 해방된 후 한참이 지나 다들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귀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고모님이 생전에 하셨던 말씀으로 미루어 보면 제 선친은 1942년경에, 대구상업학교를 나온(당시에는 수재들만 갔다고 하더군요.) 둘째 숙부가 회사 업무상 파견 나가 계시던 만주에 가서, 거기 어느 소학교에서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교사였는지, 보조원이었는지, 또는 행정사무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고, 교사 자격이 있었는지 여부도 모르겠습니다.

고모님 말씀이, 첫 월급을 일 전도 빼지 않고 고모님께 보냈기에 너무나 기쁘고 안쓰러워 며칠 동안이나 울었다고 하시더군요. 어머님이나 마찬가지인 누님이라 그러셨나 봅니다. 그 어름에 백부님은 내남면 또는 인근 산내면 면장을 1년 정도 하셨습니다.

제가 들은 말로는 일제의 공출 압박이 너무나 심해져 면장을 사직한 다음, 일제의 패망을 예측하고 직접 만주에 가서 스무 살이나 어린 제 선친을 데리고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1944년 혼인한 사촌누이가 자기 결혼식장에 제 선친이 오신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 그 때는 분명 국내에 계셨던 것 같습니다. 사촌 누님들 말로는 직장 없이 지내셨다고 합니다.

선친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교사 요원 공채를 했을 때 동양사 분야에 응시해 합격했고, 6개월 연수를 받은 후 당시 6년제였던 경주여중에 부임했습니다. 이때 최초로 교원 자격을 얻었고, 일제 때 교원경력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아직 인사기록을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제 집안에 시집온 당숙모나 형수들 중에 경주여중을 나온 제자가 많이 있는데, 그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혼인하신 1948년에 교사 경력 3년차였다고 하니 아마도 1946년에 임용되신 것 같습니다. 선친은 경주여중, 경주공고, 대구중학교, 대구농고 등의 공립학교에 재직하셨고, 6남매 교육 때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사직하신 1970년대 초반 이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기독교 미션 스쿨인 경주 문화고등학교에 재직하셨습니다.

이상이 제가 지금까지 확인한 선친의 경력입니다. 그분은 사범학교를 나오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교사가 되는 정규교육과정을 거친 적도 없습니다. 1943년 경 만주에서 소학교에 잠시 근무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그 소학교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브레이크뉴스〉가 도대체 무얼 근거로 제 선친이 일제 때 교사를 했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근거를 확보한 것이 있으면 밝혀주기를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만약 〈브레이크뉴스〉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제 선친이 일제 하 교사였다고 보도했다면 책임성 있게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면장을 지내신 백부(柳奭佑)는 1900년 생으로 평생 한학과 조선사를 연구하신 분입니다. 학교는 다니신 적이 없으며 아흔이 넘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대구 경북 지역 대학의 국문과나 역사학 교수들에게 한문학 강의를 하셨습니다. 한 번도 관직에 나가신 적이 없이 평생 ‘강사’로 사셨습니다. 돌아가셨을 때 대구 경북의 유력한 지방지에서 일대기를 실을 정도로 그 방면에서는 명성이 높았습니다.

제가 보는 백부님은 ‘개명한 유학자’였습니다.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많은 일화가 있지만 굳이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저희 집안에 떠도는 이야기를 하나만 말씀드리면, 자유당 정권 시절 관직 제의가 있었는데 이런 말로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일제 때 면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어찌 그런 자리에 나설 수 있겠는가.”

선친의 형제분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는 여든 두 살 되신 막내 숙부이십니다. 더 확실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귀도 어두우시고 기억이 왔다 갔다 하시는 탓으로 신뢰성을 부여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제 선친은 제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렇다 할 친구 한 사람도 없이 평생 학교와 가족밖에 모르고 사신 분입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저희 6남매한테도 훌륭한 역사선생님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새벽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호롱불 아래에서 책을 읽거나 무언가를 쓰고 있는 아버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세대의 대다수 국민들이 너나없이 겪었던 식민지 억압과 가난과 내전의 고통을 똑같이 겪으면서 너무나 평범한 일생을 살다 가신 제 선친의 경력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제가 국회의원이고, 저에게 적대적인 정치세력이 있고, 지금 시기 친일진상규명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가슴 아픈 가족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 있는 가족사도 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행위에 대해서 우리 세대는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 대해서, 죄악과 원한과 슬픔과 회한으로 뒤범벅된 각자의 가족사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것을 ‘정리’하고 ‘소화’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삶이며 나의 삶은 나의 삶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아버지가 한 일을 어떻게 평가하고 소화하느냐는 것입니다.

광복 60년이 다가온 이 시점에서 다시금 친일 진상규명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이 벌어진 것은 우리가 이 과제를 완수하지 못한 탓입니다. 일본군의 아들 또는 딸이라는 이유로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연좌제는 우리 헌법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일제 강점 40년 동안 부모가 무슨 일을 했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부모의 삶을 소화해 낸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친일파의 자식 여부가 아니라, 민족의 굴곡 깊은 현대사 속에서 그만큼 깊게 남은 가족사의 상흔을 치유하지 못한 채, 가까운 사람들의 과거 행적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미화하려는 정치권과 언론계 일각의 불합리한 태도입니다.

소위 ‘국가정체성’은 현대사와 가족사와 개인사의 어두운 그늘까지, 때로는 고통스럽고 추악할지라도 진실을 직시하며 의연하게 소화해낼 때 저절로 바로 서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3.1운동 정신을 계승한 자주독립국가임을 잊지 맙시다.

2004년 9월 7일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유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