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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 인&아웃]“백마디 열변보다 유머를”

입력 | 2004-08-22 18:33:00


외교통상부는 해마다 외무고시에 갓 합격해 연수 중인 예비 외교관에게 영어 유머집을 한 권씩 지급한다. ‘말(言)’로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외교관에게 촌철살인의 유머 한마디가 백마디의 열변보다 효과적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16일 크리스토퍼 힐 신임 주한 미국대사가 반기문(潘基文) 외교부 장관에게 신임장 사본을 제출하는 자리에서 그가 던진 농담 때문에 좌중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좋은 외교부 새 청사에서 (맞은편에 있는) 낡은 주한 미대사관 건물을 보면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농담에 ‘한국 정부가 미 대사관 이전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달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한미 양국 관계자 모두 잘 알고 있다.

힐 대사의 한 지인은 “미국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열렬한 팬인 힐 대사는 레드삭스의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를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말할 정도로 평소에도 유머를 즐긴다”고 전했다.

국회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3월 12일 반 장관은 주한 외교사절단과 고속철도 시승식을 가진 뒤 오찬을 하고 있었다. 반 장관이 주한 프랑스대사를 향해 “한국고속철도는 기술을 프랑스에서 사왔다. 10, 20년 뒤 고속철도가 프랑스까지 연결되면 우리 모두 기차 타고 파리로 가서 당신을 귀찮게 할 것”이라고 말해 폭소가 터졌다. 이 말로 탄핵 소식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반전됐다.

2000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협상 때 수석대표였던 송민순(宋旻淳·당시 북미국장) 외교부기획관리실장은 “지금은 협상장 소파가 딱딱하고 불편한데 다음에 만날 땐 편안한 소파에 앉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해 협상의 긴장감을 풀었다.

지난해 말 청와대와 외교부의 코드가 맞지 않아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자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코드(code·기호)’를 ‘코드(cord·끈)’로 연결해서 ‘코드(chord·화음)’를 만들어내는 게 청와대가 할 일”이란 한 중견 외교관의 뼈 있는 유머가 회자되기도 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