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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홍권희/이민자 투표권

입력 | 2004-08-11 18:36:00


“대표 없이 과세(課稅) 없다.” 13세기 영국이나 미국 독립전쟁 때의 구호가 새삼 나오는 곳은 오늘의 미국이다. 시민권자만이 최고의 권리를 누리는 미국에서 영주권자 또는 합법 이민자들이 “최소한 지역선거에는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시장과 시의원, 교육위원 선거에 참여하겠다는 요구다. 수도 워싱턴의 경우 시의원 13명 중 5명이 이를 지지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선 불법 체류자를 포함한 모든 주민에게 교육위원 선거권을 주는 법안이 11월 주민투표에 부쳐진다.

▷이민자 권리 보호론자들은 “영주권자도 시민권자와 똑같이 미국을 위해 세금을 내고 파병되기도 한다”며 힘을 실어준다. ‘민주주의의 근본에 관한 문제’라는 지적이다. 반대론자들은 시민권의 개념이 손상된다고 주장한다. 투표권은 시민권자와 단순 체류자를 구별하는 것 중 하나라는 얘기다. ‘9·11 테러’ 이후 더 힘을 얻게 된 안보논리도 동원된다. “비시민권자도 투표한다면 오사마 빈 라덴에게도 선거권을 주란 말이냐”는 주장 같은 것이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선 과거엔 이민자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해왔다. 흑인과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없던 1800년대와 1900년대 초반까지 22개주에서 비시민권자도 투표했다. 20세기 초 동유럽 이민자들이 몰려오자 투표권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급진적인 경향을 우려한 때문이다. 결국 1928년 모든 투표가 시민권자에게만 허용됐다. 그 후 시카고 등 일부에서만 비시민권자의 지역선거 참여 기회가 부활됐다. 이민자들은 정치인들을 움직이기 쉬운 대통령 선거철을 맞아 잃었던 권리를 되찾겠다고 뛴다.

▷워싱턴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를 외치는 에티오피아 출신 시민운동가 탐라트 메드힌은 ‘올해 안 되면 내년’이라는 태도다. 앤서니 윌리엄스 시장은 이 법안이 시의회에서 통과되면 서명하겠다고 약속했다. 워싱턴 시 법률의 거부권을 쥔 연방하원에서는 민주당은 찬반이 엇갈리고 있고 공화당은 반대론이 우세하다. 시민권을 취득한 미국의 한인들이 투표권자 등록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미국 연방과 지역 정치무대에 한인이 여전히 적은 이유의 하나다.

뉴욕=홍권희 특파원 koni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