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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라운드맨 첫 무대 정상우씨

입력 | 2003-12-28 18:14:00

여성 권투경기의 라운드맨으로 나선 정상우씨. 그는 ‘남자가 어떻게…’에서 ‘남자도 이렇게…’로 전환한 우리 사회 성역할 인식의 단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박영대 기자


그는 남자다. 그것도 180cm, 80kg의 건장한 체격을 자랑한다. 하지만 24일 경기 용인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권투경기에서 그는 글러브를 끼는 대신 피켓을 들었다. 글러브를 낀 사람은 몸무게 50kg도 채 안 되는 두 명의 여자였다.

‘라운드맨’ 정상우(鄭湘遇·25)씨는 매 라운드의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를 기다렸다. 180초의 혈투를 마치고 코너에서 숨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선수들이 쉬는 1분 중 40초 동안 사각의 링에서 피켓을 들고 스텝을 밟거나 춤을 추기 위해서다.

이날 국내 첫 여자권투 세계챔피언 이인영의 플라이급 1차 방어전에 전격 등장한 라운드맨. 주최측은 이 라운드맨이 세계 최초라고 하지만, 전에 보기 힘들었던 풍경인 것만은 틀림없다.

“남자가 어디 할 일이 없어서….” 예전 같으면 터져 나올 핀잔이 “남자가 하니까 더 멋있네”로 바뀌었다. 처음엔 반대했던 부모님도 “괜찮더라”를 연발했다.

“군 제대 뒤 제 인생은 모두 여자와 관련됐어요. 첫 직장이 여성의류 수출업체였는데 저만 빼고 스무 명의 임직원이 모두 여자였죠. 거기서 일을 배우다 2002년 일본 오사카에서 여성옷 전문점을 열었거든요.”

라운드맨 선발대회를 거쳐 이날 경기에 나선 사람은 정씨를 포함해 모두 6명. 보디빌더 모델 보디가드 쇼호스트 등의 경력을 가진 다른 라운드맨과 달리 정씨는 평범하다. 하지만 그는 ‘남아대장부’의 조건을 두루 갖췄다. 태권도 3단에,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이다.

“‘세계 최초’라는 말에 무작정 선발대회에 나섰는데, 막상 가 보니 배가 나온 것도 저 하나더군요. 그런데 왜 제가 1위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막상 여성들 싸움의 들러리로 나선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여자들이 피 흘리며 심각하게 싸우는데 생글생글 웃으며 춤추고 있는 네 모습을 그려 보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버쩍 났어요. 고민 끝에 권투시합과 별도의 완결성을 지닌 공연으로 승부하자고 마음을 정리하고 무대에 나섰습니다. 무대를 돌다 관중석 맨 앞에 앉은 할아버지 세 분을 봤는데 박수를 치며 흥겨워하시더군요. ‘성공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여성상이 궁금해졌다. “남자 말 잘 듣는 한국 여자죠.” 그는 역시 ‘한국 남자’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