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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천광암/‘이·태·백’

입력 | 2003-12-12 18:24:00


태백은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의 자(字)다. 시성(詩聖) 두보는 이태백의 시에 대해 “붓끝이 움직이니 비바람이 놀라고, 시가 이뤄지니 귀신이 운다”고 극찬했다. 당나라의 문인 한유는 “이백과 두보의 문장은 그 빛이 만장(丈)이나 뻗었다”고 했다. 후세에 신선으로 추앙되는 이태백이지만 현실의 삶은 불운했다. 입신출세를 꿈꾸며 두 번이나 관직에 나갔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의 시에는 공을 세운 뒤 물러나 산야에 묻히고자 하는 갈망, 그렇게 안 되는 데 따른 좌절감이 적지 않게 배어 있다.

▷요즘 아무에게나 ‘사오정’에 대해 물으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나 ‘조기퇴직’이라는 대답이 먼저 튀어 나온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의 종자라는 대답을 듣기는 쉽지 않다. 앞으로 이태백의 이미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다면 ‘시인’ ‘신선’ ‘달’ ‘양귀비’ 등보다 ‘청년실업’이라는 응답이 많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청년실업률이 8%를 오르내리고 구직 단념자가 늘어나면서 ‘이십대 태반이 백수건달’을 줄인 ‘이태백’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세상이니까. 백수건달만 해도 고기나 밥 대신 향(香)을 먹고살고 허공을 날아다니며 노래를 한다는 불교의 신 ‘건달바(乾達婆)’에서 유래한 말이니 괜한 상상은 아닐 터이다.

▷청년실업을 빗댄 풍자어는 이 밖에도 적지 않다. 취업에 자신을 잃은 대학생들의 휴학이 늘어나면서 ‘대학 5학년’이 ‘고교 4학년’만큼이나 널리 쓰인다. 대기업에 취직하기는 ‘바늘구멍 통과하기’이고, 성공하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한다. 제삼자는 “참 말 만들기 좋아하는 세상”이라며 웃어넘길 수 있겠지만 당사자나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오른 청년실업자들의 호소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머리 깎고 산에나 들어가 볼까. 그런데 산에서는 받아 주려나.” “나이도 먹어 가고, 감옥에 들어가 살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점점 사람이 싫다. 아니 두렵다.”

▷청년 실업자들 가운데는 반드시 번듯한 대기업에 취직하겠다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봉 1500만원짜리 일자리만 주어져도 감지덕지할 사람이 많다. 기업에 150억원이 있으면 청년실업자 1000명을 고용해서 좌절의 늪에서 건져낼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차떼기’ ‘책떼기’가 한번 이뤄질 때마다 100억∼150억원이 넘어갔다고 한다. 청년들의 일자리 수천개를 정치인들이 훔쳐간 것이다. 시거든 떫지나 말라고 했다. 이런 정치인들이 무슨 낯으로 “청년에게 일자리를 주겠다”고 외쳤단 말인가.

천광암 논설위원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