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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11년 퓰리처 사망

입력 | 2003-10-28 18:34:00


“만약 신문이 형세를 관망하며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나는 무덤 속에서도 돌아누울 것이다.”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

‘현대 저널리즘’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조지프 퓰리처. 언론의 공공성과 상업주의라는 이율배반성을 그만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인물은 없었다. 그는 ‘정론’과 ‘대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언론의 노벨상’이라는 퓰리처상을 만든 그였지만 신문 라이벌인 허스트와 부수경쟁을 벌이면서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유산을 남긴 것도 그였다.

그가 또 헝가리에서 이민 온 빈털터리 청년으로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와 뉴욕 ‘월드’라는 미국 정상의 일간지를 소유한 신문왕이 되기까지 인생역정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기도 하다.

언론인으로서 평생 동안 그를 지배한 것은 ‘폭로(暴露)의 열정’이었다.

‘신문에 폭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 어떤 법률과 도덕보다도 더 많은 범죄를 예방한다’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파나마운하 건설 과정에서 비리를 덮으려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당당히 맞섰고 영국과의 대치상황에서 모두가 전쟁을 외칠 때 평화주의를 고수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200만달러의 기금으로 제정된 퓰리처상은 올해로 86년의 역사를 헤아린다. 매년 4월이 되면 전 세계의 매스컴이 주목하는 권위 있는 상이지만 때때로 수상자 선정을 둘러싸고 뒷말을 남겼다.

가장 논란이 됐던 것이 1994년 피처사진 부문의 ‘독수리와 소녀.’

굶주림에 지칠 대로 지친 아프리카 소녀와 그를 노려보는 독수리를 찍은 사진은 “인간성 대신 상(賞)을 택했다”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사진 촬영보다는 먼저 소녀를 구해야 했다는 것. 수상자인 뉴욕 타임스의 캐빈 카터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3개월 뒤에 목숨을 끊었다.

그 자신 기자 출신이었던 퓰리처가 현장에 있었다면 어떤 판단을 했을까.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