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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보수王政’ 변화 조짐…건국 71년만에 첫 전국선거

입력 | 2003-10-14 18:08:00


중동의 보수 왕정국가 사우디아라비아가 사상 처음으로 지방의회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13일 발표했다.

이에 따라 대내외에서 민주화 압력을 받고 있는 사우디의 정치개혁이 가시화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건국 이후 첫 전국 선거=사우디 관영 SAP 통신은 “사우디 내각이 각료회의에서 선거를 통해 지방 현안들에 대한 시민참여를 증진시키기로 결정했다”며 “14개 지방의회 의원의 절반을 선출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사우디의 실질적 지배자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왕세제는 “1년 안에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조치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선거가 치러지면 1932년 사우디 건국 이후 첫 전국 선거가 된다. 사우디에는 국회에 해당하는 기구는 없으며 국정자문기구인 ‘슈라위원회’는 국왕이 위원을 임명한다.

이번 결정은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제1회 인권회의 개막에 맞춰 나왔다. 정치분석가인 다우드 알 세리얀은 “불과 1년 전만 해도 선거에 관한 글을 쓰는 것조차 위법이었다”며 “민주화로 나아가는 상징적 조치”라고 환영했다.

▽국내외의 민주화 압력=사우디는 9·11테러 이후 미국과 서방 국가들로부터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근거한 극단적인 보수체제를 개방하라는 압력을 받아 왔다. 미국은 이런 사우디의 체제가 9·11과 같은 테러를 일으키는 극단주의자들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비난해 왔다.

사우디 내에서도 최근 민주개혁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지난달에는 지식인 학자 기업가 등 305명이 근본적인 민주개혁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압둘라 왕세제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특히 서명자 중에는 전례 없이 여성 51명이 포함됐다.

5월에는 리야드에서 자살 폭탄테러가 발생하자 압둘라 왕세제는 테러 단속을 강화하는 한편 국민의 참여를 확대하고 여성고용 범위를 넓히겠다고 약속했다.

앞서 1월에도 지식인 100여명이 삼권분립을 촉구하면서 슈라위원회를 대체할 선출 국회를 만들자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선거 정말 실시될까?=그러나 이번 결정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 사우디 내각은 선거 시점을 밝히지 않았다. 여성의 투표참여 여부도 알 수 없다. 사우디 여성은 아직 자동차 운전이 허용되지 않고 있으며 신분증도 2년 전에야 발급받았다.

영국 런던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권리보호위원회’의 모하메드 알 마사리 위원장은 “1975년 지방의회를 구성하는 법률이 공표됐지만 이후 선거는 한 번도 치러지지 않았다”며 “이번 결정도 구두선에 그칠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이진기자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