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 인류는 여러 종의 고대 인류가 가졌던 유전적 특징을 이어받고 있는가, 아니면 단 한 종의 순수한 진화 계통만을 따르고 있는가. 이는 유전자 비교에 의해서도 완벽히 풀리지 않는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사진은 인류 진화의 개념도.동아일보 자료사진
◇유전자 인류학/존 릴리스포드 지음 이경식 옮김/407쪽 1만8000원 휴먼북스
“1만년 전, 10만년 전, 또는 그 이전에 당신의 조상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누구나의 원형의식을 자극하는 이 질문에 인류는 갖가지 방법으로 대답해 왔다. 처음에는 신화와 전설로, 그 다음에는 화석과 골상학으로.
오늘날 우리는 유전자 비교법 덕분에 훨씬 세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생물 종(種), 민족, 개체가 가진 특정 유전자의 DNA를 비교함으로써 각자의 조상이 갈라져 나온 시점을 추산할 수 있고, 이를 수형도(樹型圖) 등으로 도식화할 수도 있다.
유대계 백인 인류학자인 저자도 TV 미니시리즈 ‘뿌리’에 열광한 나머지 ‘생물학적 인류학’이라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연구 분야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그는 유전자로 본 아메리카 원주민과 폴리네시아인의 이주 경로, 농경문화 확산과 유럽인의 북방 이주사 등 갖가지 흥미로운 과제에 도전한다.
각 장의 체제는 개별 과제를 중심으로 쓰여 있어 ‘유전자 인류학’에 대한 개관서로 보기는 어렵다. 반면 각각의 장이 담고 있는 화제는 사뭇 흥미롭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아일랜드의 아란군도에서 저자는 다른 지역과 큰 차이를 지닌 유전자 집단을 발견한다. 알고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1588년 이래 수백년 동안 영국군이 이 섬에 주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중심주제는 이런 ‘종족사’를 뛰어넘어 훨씬 거시적이다. 저자는 10개 장 중 2개 장을 털어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기원에 대해 논한다. 화석 자료에 따르면 약 10만년 전, 최소 세 종류의 상이한 인류가 지구상에 공존했다. 두 종류는 어디로 간 걸까.
‘아프리카인 대체설’은 고대 인류에서 현생 인류로 진화한 한 무리가 아프리카에서 다른 지역으로 확산돼 선주민을 대체했다고 본다. ‘다지역 기원설’은 여러 고대인류가 각각 현생인류로 진화했다고 본다. 오늘날 유전자 분석 등 여러 가지 증거들이 ‘아프리카인 대체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다지역 기원설을 완전 폐기할 수 없다는 조심스러운 가설을 제기한다. 오늘날의 인류가 대체로 ‘아프리카 출신’ 현생인류의 특질을 가진 것은 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일 수 있으며, 여타 종족들의 유전자가 완전히 사라진 증거는 없다는 것. 한 예로, 네안데르탈인의 대부분은 두개골 뒤쪽이 약간 내려앉은 형태이며 오늘날 유럽인의 2%는 이런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현생 인류의 ‘유전자 풀’에 섞인 증거가 될 수 있다.
저자가 백인인 만큼 한국인의 유전적 궤적에 대한 설명은 이 책에 없다. 그러나 세계 각 종족집단간의 유전적 거리를 나타낸 도표는 우리의 관심을 끈다. ‘유전적 거리’만을 놓고 볼 때 한국 일본 몽골인은 비슷한 위치에 몰려 있으며 이들과 유럽인 사이의 거리는 남중국 태국 필리핀인과의 거리보다 짧다.
이 밖에도 여러 소주제가 눈길을 끈다. 모계로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와 부계로 유전되는 Y염색체를 각기 분석한 결과, 미국 흑인들의 유전자에는 대체로 많은 백인 남성의 유전자가 섞여 있었지만 백인 여성의 유전자는 거의 섞이지 않았다. 여러 유대인 집단 중 유독 에티오피아 유대인만이 그 지역 토착민과 유사한 유전자형을 나타냈다. 이는 이들이 ‘이주’가 아닌 ‘집단 개종’을 통해 유대인이 됐다는 전설을 뒷받침한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