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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재벌 탄압’ 권력투쟁 비화

입력 | 2003-07-10 19:07:00


러시아에서 잇따르고 있는 재벌 탄압이 정치권의 권력 투쟁 양상으로 비화하고 있다.

12월 총선과 내년 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최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 세력을 중심으로 크렘린이 일부 재벌 총수를 검찰에 소환하거나 구속하자 이에 맞서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옛 측근 그룹과 올리가키(러시아 과두재벌) 등 ‘구주류’가 대항하고 나서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올리가키 세력의 대표 격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전 로고바스 그룹 회장은 9일 “푸틴 대통령이 재선되면 개혁을 명분으로 재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푸틴이 아닌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레조프스키 전 회장은 옐친 정권의 최고 실력자였으나 푸틴 정부와의 갈등으로 유럽에 망명 중이다.

푸틴 대통령의 잠재적 경쟁자로 꼽히면서 크렘린과 갈등을 빚어온 미하일 카시야노프 총리도 8일 지방순시 중 “대기업 총수들을 잇달아 검찰에 소환하고 구속한 것은 과도한 조치”라며 크렘린을 직접 공격했다. 카시야노프 총리는 베레조프스키 전 회장이나 이번에 검찰에 소환됐던 미하일 호도로프스키 유코스 회장 등과 밀접한 사이다.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 격인 러시아기업연맹(RSPP)도 9일 모임을 갖고 재계를 대표해 크렘린에 강력한 항의의 뜻을 전달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크렘린측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검찰은 유코스 등 석유재벌들의 탈세혐의에 대해 본격적으로 수사를 벌이기로 했다. 감사원도 재계 순위 2위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석유기업 시브네프티의 대주주)에 대한 내사에 들어갔다. 옐친 정권의 실력자였던 아브라모비치씨는 최근 영국의 명문 축구단 첼시를 인수해 화제를 모은 인물이다. 크렘린측은 양대 선거를 앞두고 구주류의 자금줄을 차단해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원천 봉쇄한다는 계산이다. 크렘린은 또 구주류가 개혁에 걸림돌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익보다는 개별 재벌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보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지난달 푸틴 대통령이 ‘3선 불출마 선언’을 한 것을 계기로 ‘푸틴 이후’를 노리는 구주류와 푸틴 측근 그룹간의 권력 투쟁의 시작으로 분석하고 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