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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2인자]당당한 '넘버 투' M&A주도…재계의 2인자들

입력 | 2003-07-03 16:30:00

재계의 당당한 2인자들. 왼쪽부터 네오위즈 박진환 사장, 넥센타이어 이규상 부회장, 퓨쳐시스템 정영조 상무. 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1990년대 후반 재계에 떠돌던 소문 한 가지. 한 재벌그룹 오너가 당시 2인자로 평가받던 한 계열사 사장을 자기 차에 태워 이야기를 나누며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역정을 냈다. 오너는 운전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명령한 뒤 사장에게“너, 당장 내려”라고 소리쳤다. 오너는 사장을 고속도로 갓길에 세워 둔 채 그대로 떠났다. 재계에는 이와 비슷한 소문이 적지 않았다. 오너가 자기보다 열 살이나 나이가 많은 계열사 사장의 정강이를 걷어찼다느니, 가족과 함께 휴가를 가던 사장이 “오너가 찾는다”는 전갈에 고속도로에서 차를 U턴했다느니 하는 소문들이다.

기업에는 1인자가 있고 그를 보필하는 2인자가 있다. 겉보기에 2인자들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른 인물들.

그러나 많은 2인자들은 ‘만인지상’의 영광보다 ‘일인지하’의 그늘을 더 강하게 겪었다. 1인자는 언제든지 2인자의 숨통을 누를 수 있었고 2인자는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쥔 1인자에게 열렬한 충성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이와는 다른 모습들이 몇몇 기업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인자의 그늘에서 위만을 쳐다보는 2인자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소신을 바탕으로 떳떳하게 일하는 ‘당당한 2인자’들의 등장이다.

●1인자를 설득해 경영자에 오르다

2001년 초 네오위즈의 창업자 나성균 사장(당시 30세)과 네오위즈에 입사한 지 반년도 안 된 한 20대 팀장이 사무실에서 마주앉았다. 팀장은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네오위즈가 가야 할 길은 바로 게임 사업에 진출하는 겁니다. 네오위즈는 이제 새로운 수익 모델을 결정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 일을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나 사장은 오랜 고민 끝에 2001년 3월 회사를 이끌 새 사령탑을 임명한 뒤 경영에서 손을 뗀다. 새 사령탑이 바로 나 사장에게 “사장 자리를 내 놓으라”고 ‘협박’한 박진환 현 사장(31)이다.

스스로 회사의 비전을 설정하고 그것으로 1인자를 설득해 한 기업의 대표에 오른 박 사장. 그는 회사 지분이 0.04%에 불과한 전문경영인이지만 오너를 비롯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소신대로 회사를 경영하는 ‘당당한 2인자’다.

어떻게 감히 일개 팀장이 사장에게 ‘나를 사장 시켜 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이 질문에 대해 “기업 경영은 잘 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하고 싶은 사람이 맡아야 한다. 당시에는 내가 적임자였다”고 간단히 답했다.

오너인 나 전 사장은 최근 회사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지금 네오위즈는 소유와 경영이 완전히 분리된 벤처기업이다. 박 사장이 이끄는 네오위즈는 지난해 ‘아바타 유료 서비스’ 돌풍을 일으키며 매출 415억원, 경상이익 93억원의 흑자를 냈다. 전문경영인의 경영 성과 덕에 연초 200억원 남짓이었던 오너의 주식 평가금액도 최근 1000억원대에 육박할 정도로 늘어났다.

박 사장은 단호하게 “네오위즈에 뼈를 묻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뼈를 묻고 싶다고 묻어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런 종류의 충성심이 회사에 별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고 믿는 것. 그는 언제든 회사에 더 적합한 경영자 후보가 등장하면 주저 없이 물러날 것이라고 했다.

박 사장은 1996년 나 전 사장을 만났고 2000년 말 네오위즈로 옮겼다. 그에게 ‘1인자’에 대해 물었다.

-나 전 사장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강렬한 첫인상이 있었나요? ‘운명적인 만남’ 같은 느낌요.

“전혀요. 그 분은 별로 인상적인 데가 없었어요.”(웃음)

―나 전 사장이 불러서 회사를 옮기신 거죠?

“아뇨. 원래 네오위즈에 친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 사람들한테 믿음이 가서 여기 온 거죠.”

―오너를 평소 어떻게 부르시는지.

“뭐라고 부를 것 같아요?(웃음) 그냥 ‘형’이라고 불러요.”

●1인자의 동지이자 벗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국토지공사 건물 7, 8층에 자리 잡은 인터넷 보안솔루션업체 퓨쳐시스템. 87년 창업한 이 회사는 현재 직원 수 157명, 지난해 매출 215억원, 시가총액 530억원으로 코스닥 800여 기업 가운데 120위권의 회사다.

회사 한구석에는 두 개의 사무실이 나란히 붙어 있다. 왼쪽은 최대 주주이자 경영자인 김광태 사장(44), 오른쪽은 2대 주주이자 기술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정영조 상무(40)의 사무실이다. 두 사무실 모두 딸린 비서가 없으며 방 크기도 똑같다. 나란히 늘어선 두 사무실에서 10여m 떨어진 곳 벽에는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지 말자’고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다.

두 사람은 85년 함께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사과정에 입학한 동기. 김 사장이 87년 퓨쳐시스템을 창업했고 정 상무는 92년 합류했다. 김 사장은 2001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 상무는 뛰어난 능력과 객관적인 사고를 가진 세계적인 실력자로, 둘이 힘을 합하면 확실히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모셔오는 데 전력을 다했다”고 밝혔다.

그 뒤 정 상무는 회사가 증자를 할 때마다 조금씩 투자해 현재 11.83%의 지분을 가진 2대 주주가 됐다. 굿모닝신한증권 소프트웨어 담당 오재원 애널리스트는 “주식 수와 상관없이 퓨쳐시스템에서 정 상무의 역할은 ‘회사의 절반’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김 사장이 경영자라면 정 상무는 기술자다. 정 상무는 회사의 틀이 잡힌 95년 이래 줄곧 회사의 모든 소프트웨어와 기술을 연구하고 만들었다.

그는 스스로를 ‘장인정신이 있는 기술자’라고 부른다. 제품이 어디 나가서 꿇리는 걸 못 보는 성격. 5분 전 소개받은 사람의 이름도 잘 못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지만, 컴퓨터 칩에 적힌 10여자리 일련번호는 줄줄 외운다.

김 사장과 정 상무의 역할은 엄격히 구분돼 있다. 정 상무도 경영에 대해서는 사장의 결정을 절대 존중하는 대신 김 사장도 정 상무를 ‘최고 기술자’로 대접한다.

정 상무는 인터뷰 도중 “우리 두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2인자가 1인자와 자신을 뭉뚱그려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회사는 많지 않다.

갈등은 없느냐는 질문에 “언쟁은 있지만 분쟁은 없다”는 게 정 상무의 대답. 두 사람 모두 자기 역할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 상무는 “우리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보다 회사를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대의를 더 중시한다”고 답했다.

1인자가 아니어서 힘들었거나 서러웠던 점은 없었을까.

“경영은 경영자의 몫이고, 내게는 나의 몫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일로 맺어진 사이이고 또 서로의 능력을 존중해줍니다. 그거면 됐죠, 뭐.”

●새로운 기업을 일궈낸 2인자

1999년 3월 타이어튜브를 재생하던 중소기업 흥아타이어는 한때 우성그룹의 돈줄이었던 ‘우성타이어’ 인수를 결정했다. 우성타이어는 1996년 부도가 나 법정관리 상태였고 외환위기를 거치며 최악의 재무구조로 고전하고 있었다. 부채비율 6837%에 금융비용부담률은 37.8%. 100원어치 물건을 팔면 37.8원을 은행 이자로 물어야 했다.

국내 기업 가운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 회사의 인수합병(M&A)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당시 흥아타이어 이규상 사장(54). 그는 인수 뒤 2000년 회사명을 넥센타이어로 바꾸고 회사 재무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면서 넥센타이어를 지난해 부채비율 70%, 경상이익 365억원의 우량기업으로 바꿔놓았다. 넥센타이어의 눈부신 변모에 맞춰 지난해 9월 모기업인 흥아타이어도 사명을 넥센으로 바꿨다.

이 회사 최대 주주는 강병중 회장(64). 그러나 업계에서는 넥센타이어 하면 회사 2인자인 이규상 부회장의 얼굴을 먼저 떠올린다.

1999년 한국에는 M&A의 개념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다. 특히 법정관리 기업에 대한 M&A는 전례가 없었다. 흥아타이어가 우성타이어를 인수하는 것은 누가 봐도 모험으로 보였다. 이 결정을 내린 사람이 바로 이 부회장이었다. 그는 우성타이어의 재무구조를 면밀히 분석해 회생 가능성을 검토한 뒤 ‘법정관리기업 인수’라는 엄청난 플랜을 들고 오너를 설득해 강 회장의 선택을 얻어냈다.

지난달 27일 있었던 이 부회장과의 인터뷰.

이 부회장은 어떤 질문을 던져도 넥센타이어에 관한 각종 수치로 답을 대신했다. 그는 회사 영업이익 성장률처럼 미세한 수치의 소수점 둘째자리까지 정확히 암기하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 벌떡 일어나 칠판에 꼼꼼히 수치를 적으면서,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를 반복했다. 회사의 한 간부는 “이 부회장은 지분은 없지만 사실상 넥센타이어 창업자 역할을 한 사람”이라며 “회사에 대한 모든 것, 아마도 회사 식당 숟가락 숫자까지 알고 있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전문경영인의 자질에 대해 물었다.

“충성심보다는 사명감이 더 중요합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 회사는 보시다시피 99년 매출이 말이죠….”(이후 회사 매출에 대한 설명이 10여분간 이어졌다)

올해 초 그가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명실상부한 그룹 ‘2인자’가 된 기분을 물었다.

“2인자는 무슨, 직급 인플레가 심해서 괜히 부회장 자리가 난 거죠. 그건 그렇고 우리 회사가 최근 추진하는 스피드 경영의 성과로 인해 최근 국내시장 점유율이….”(다시 10여분간 시장 점유율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