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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홍찬식칼럼]누가 약자인가

입력 | 2003-06-27 18:26:00


나라 전체가 힘겨루기의 장(場)으로 변하고 말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동물세계의 법칙이 요즘처럼 잘 들어맞은 적이 없다. 집단을 이뤄서 거리로 나서면 뭔가 얻는 게 있다. 다른 집단들도 가만히 앉아 있을 리 없다.

이러다가는 1년 365일 대규모 파업이나 시위와 ‘동거’하는 시대를 각오해야 할 판이다. 이것이 개혁을 얻는 대신 치러야 할 대가라면 어떻게든 감내해야 하지만 최근 벌어진 일들은 ‘밀림의 왕자’처럼 힘센 자가 득세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개혁의 이름으로 ‘힘의 논리’를 부르는 전형적인 ‘개혁의 역설’이다.

▼거리로 나선 노조원들 ‘힘’ 과시 ▼

최근 노조들의 ‘승리 행진’에는 반드시 불법적인 투쟁 방식이 동반됐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노조라는 결집된 힘을 과시하면서 국민의 피해와 불편을 야기하는 불법 행동을 하면 정부는 어김없이 노조의 손을 들어주었다.

노사분규가 이전 정권과 비교해 줄었느냐 늘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이런 일이 내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정부는 노동정책에서 ‘친(親)노동자적’이라는 말을 듣고 있지만 정부 스스로는 노사 균형 정책을 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가 불법에 대해 ‘법과 원칙’을 강조하다가도 막상 마무리 과정에서는 ‘그래도 화해가 낫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정부가 ‘친노(親勞)’ 성향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정부가 얼마 전 내놓은 새로운 논리는 ‘노조가 불법 파업을 하더라도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조가 수출 길을 막고 은행을 마비시키며 학교 수업을 중단하면 상대편은 협상의 입지와 힘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초조와 강박에 쫓기기 때문이다. 노사 모두에게 공정한 ‘게임의 룰’이 아닌 것이다. 대화 이전에 불법 앞에 원칙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문제다.

이런 일들은 정부 입장에서 노조가 자신들의 지지 세력이라는 동류의식과 ‘노조는 사회적 약자’라는 다분히 정서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문제는 법의 형평성이다. 만약 힘없는 소시민들이 불법적인 일을 했을 때 과연 어떤 결과가 돌아올지 궁금하다. 대화와 타협은 고사하고 당장 준엄한 법 집행의 화살이 날아 올 것이다.

거리로 나선 노조원들을 더 이상 사회적 약자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사회 전체를 들썩거리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어느 집단보다 강한 파워를 지니고 있다. 집단으로 뭉칠 수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약자가 아니다.

진정으로 약자를 꼽는다면 요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시간강사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한 시간 강의에 3만원 안팎을 받아 월수입이 수십만원에 불과하며 방학 기간에는 그나마 월급도 없다. 노조 결성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직장 의료보험 가입도 안 된다. 대학에서 그만두라면 언제든지 그만두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장애인, 이혼으로 버려진 아이들, 40·50대 실업자, 노인들도 절실하게 보호받아야 될 ‘진짜 약자’들이다. 이들이 약한 이유는 ‘뭉칠 힘’조차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가 ‘힘센 노조’들에 대하는 것처럼 이들에게 온정적인 얼굴을 보여주고 있을지 의문이다.

▼ 뭉칠 힘 없는 ‘진짜 약자’에 눈길을 ▼

석학 칼 포퍼는 이와 관련해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좌파(진보세력)의 원래 기능은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지만 이런 기능은 변질되고 말았다’고 개탄한 것이다. 좌파가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인해 더 이상 약자가 아닌 경우에도 노조 편에 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진보세력이 주위를 둘러보고 약자가 있는 곳으로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고 주문한다. 진보 성향의 정부가 들어선 우리 상황에도 정확히 들어맞는 통찰력이 돋보인다.

정부가 진보를 표방한다면 힘센 노조에 너그러울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약자쪽에 따듯한 눈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포퍼의 주문대로 정부가 지금부터라도 눈에 안 뜨이는 ‘진짜 약자’를 스스로 찾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경제가 안 좋을수록 약자들은 더 서럽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