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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설 '나비야 청산가자' 연재 시작하는 박경리

입력 | 2003-02-05 19:23:00


4일 오후 강원 원주 토지문화관에 닿았을 때 앞 산으로 붉은 해가 뉘엿뉘엿지고 있었다. 두텁게 쌓인 눈과 고즈넉한 사위. 박경리 선생(77)의 집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불빛. 겨울의 한 가운데, 작가는 늘 그렇듯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미소로 맞아주는 작가의 등 뒤로 타닥타닥 장작타는 소리가 기분좋게 울렸다. 벽난로 앞에 작은 상을 펴고 앉아 새 소설을 집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현대문학’ 4월호부터 연재를 시작하는 ‘나비야 청산가자’의 2회분을 쓰고 있다고 했다. 만년필 글씨로 메운 원고지가 상 위에 가득했다.

“이제 문화관도 자리를 잡았고, 차분히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날씨가 궂어서 몸이 별로 좋지가 않네. 글도 잘 안 풀리고. 지금까지는 고인 물 퍼내듯이 술술 잘 나왔는데….”(웃음)

‘토지’ 이후 9년만에 쓰는 ‘나비야…’는 본래 ‘현대문학’에 단편으로 실으려고 준비했던 작품.

“수채화 같은 작품을 짧게 쓰려 했는데, 해방 후 지식인들의 고뇌를 담으려다 보니 그 배경이 간단하지가 않아. ‘토지’ 이후 50년의 세월을 그리려고 마음을 먹었지요.”

“글을 쓰지 않고 지낸 세월이 한참이지만, 작가의 머리속에는 늘 무언가가 움직이고 고여 있지요. 그런 마음도 있어요. 이것 봐라. 내가 80세가 다 돼 가면서도 글을 쓴다. 조로(早老)하지 마라. 이런 오기가 있다고. (웃음) 이번이 마지막 작품이 되지 않겠어요…. 세상 떠날 때까지 끊임없이 일해야지요. 나는 일 안하고 가만히 못 있어. 또 작가는 끝날까지 글을 써야지.”

죽는 날까지 일하고 배우는 게 곧 사람이라고 그는 여러 번 강조했다.

“토지를 쓰는 26년간 나는 토지와 함께 자라고 배워 왔지요. 문화관 일에 매진했던 지난 9년 동안에도 치열한 현실과 부딪히며 또 배움을 얻었습니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도 그럴테지요.”

벽난로가 있는 방에서 글을 쓰며 왜 이렇게 목이 아플까, 하다가 산소가 부족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고 밭일을 시작했다. 그래서 옥수수를 한날 심었는데 한꺼번에 소출이 나와 이듬해에는 몇 주간씩 기간을 두고 나눠 심는 법을 배웠다며 그는 웃었다.

작가가 각별한 공을 들인 토지문화관이 오봉산 자락에 세워진지 올해로 5년째. 그의 말처럼 ‘현실’과 맞닥뜨려야 했던 지난 날이 쉽지만은 않았다.

“속상한 적이 셀 수 없이 많았지. 산에 올라가서 산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혼자 가슴앓이도 하고 그랬어요. 내가 이걸 왜 시작했을까 하고 예전에는 탄식했는데, 이제는 물흐르는 것처럼 마음을 맡겨 둔다고. 문인들을 돕고 지원하는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토지문화관은 100일간 문인에게 창작 및 집필 공간을 무료로 제공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작가의 ‘봉사정신’이 문화관의 튼튼한 기둥이 된다.

“문화부의 지원을 지난 2년간 받았는데, 올해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지원해주지 않아도 이 일은 계속해 나갈 생각이예요.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으니까요.”

‘능동적인 생명을 생명으로 있게 하기 위하여 작은 불씨, 작은 씨앗 하나가 되고자 하는’(토지문화재단 ‘설립의 뜻’ 중) 작가의 마음이 아름답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봄이 되면 오봉산에 냉이 두릅 곰치 더덕이 연한 싹을 틔울 거라고, 밭일을 하고 있으면 손가락 한 마디쯤되는 작은 새가 날아와 재재거리는 것이 참 예쁘다면서, 손수 키운 갓으로 담은 김치를 초록색 보자기에 꼭꼭 싸주었다.

원주=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