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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포스코 경영혁신 어떻게 성공했나

입력 | 2002-09-11 17:59:00


작년 초 포스코 표준화팀 임광호 팀장은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발견했다. 똑같은 V벨트(설비부품)를 포항제철소는 개당 6만312원에, 광양제철소는 1만9286원에 사 온 것.

두 제철소는 원자재와 부품을 각기 구매했고 부품을 일컫는 용어도 서로 달라 본사나 포항측은 그동안 3배나 비싸게 부품을 구입하는 줄 모르고 있었다.

표준화팀은 두 제철소의 구입 품목 59만개를 일일이 대조해 봤다. 놀랍게도 절반 이상이 똑같은 부품을 서로 이름만 다르게 부르고 있었다. 가격도 제각각이었다.

“붕괴 직전의 바벨탑 같았다.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부서 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용어와 데이터 작성기 준이 달라 조직 내에서도 대화가 안 되는 공룡이 됐다.”(PI기획팀 황용립 팀장).

이처럼 안팎에서 ‘심각한 동맥경화증에 걸렸다’고 평가받던 포스코가 99년 1월 경영혁신을 시작한 지 4년여 만에 전 세계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일본 산업경제성은 6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일본 경제의 재생 조건’이라는 보고서를 올리면서 조직개혁에 성공한 기업으로 ‘제너럴 일렉트릭(GE), 도요타 자동차, 포스코’ 등 3개사를 꼽았다. 세계적인 솔루션업체인 오라클도 포스코가 오라클의 컨설팅을 받아 설계한 시스템을 세계표준으로 선정했다.

포스코는 어떤 방법으로 동맥경화를 치료한 것일까.

▽표준화와 정보기술(IT)로 바벨탑의 붕괴를 막다〓유상부(劉常夫) 포스코 회장은 2000년 말 혁신팀으로부터 “조직내 부서간의 장벽 때문에 정보 공유가 안 돼 빠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유 회장은 즉시 열연판매팀에 “포스코가 H강관에 지난 3년간 판매한 액수 및 매출이익, 매출채권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보고서 내용이 사실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는 의도였다. 열흘이 지나도 보고서는 올라오지 않았다.

유 회장은 이후 포스코의 ‘동맥경화’를 치료하기 위해 프라이스워터하우스(PwC) 등 5개사 컨설턴트 200여명과 포스코 직원 2000명을 투입해 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모든 부서가 공통된 기준으로 데이터를 만들도록 하는 표준화 작업을 1년여 계속한 뒤 정보통신기술을 도입해 2만명이 실시간으로 이 정보를 공유하도록 했다. 데이터 처리를 위해 54억원을 들여 미국의 항공우주국(NASA)이 사용하는 슈퍼컴퓨터도 도입했다. 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ERP), 활동기준 원가회계(ABC), 전자상거래 등 각종 신경영기법도 과감하게 도입했다.

유 회장이 열연판매팀이 지시했던 정보를 이제는 단 한번의 클릭으로 얻을 수 있다.

▽조직의 벽을 허물어라〓99년 초 혁신팀은 포스코의 현재 납기(30일)를 절반으로 줄이자고 제안했다. 온갖 부서에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현장 엔지니어들은 “너희들이 현장에 내려와서 직접 해 보라”며 야유를 보냈다.

납기단축팀은 우선 고객에게서 주문을 받아 생산일자를 조정하던 기간(10일)을 아예 없애기로 했다. 본사는 그동안 고객의 주문서를 열흘 단위로 끊어서 제철소로 내려보냈다. 열흘간의 주문서를 비슷한 성격의 제품끼리 분류해 생산날짜를 조정한 것.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앞으로 이 과정을 아예 없애고 주문이 온 순서대로 제품을 생산하기로 한 것. 작년 7월 1일 새로운 시스템으로 철강생산을 시작했다. 납기는 줄었지만 생산량이 예전보다 30% 이상 떨어졌다.

“5개월 연속 생산량이 목표에 미달했다. 옛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2년간의 고생이 아까워 전 직원이 밤잠을 안 자면서 개선책을 내놓았다. 12월부터 생산목표도 달성하면서 납기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포항제철소 2열연공장 민경준 공장장)

주문에서 선적까지 걸리는 ‘납기 14일’은 전 세계의 어느 제철소도 따라올 수 없는 속도다.

신제품개발 기간도 4년에서 1년6개월로 단축됐다. 연구개발단계부터 마케팅, 연구소, 생산현장팀이 함께 일하면서 이룬 성과. 1000억원 미만의 투자는 담당임원이 결정하면 끝이다.

▽스피드 경영〓의사결정도 벤처기업처럼 빨라졌다. 포스코는 최근 기아특수강 인수 관련 실사참여를 결정하는 데 사흘을 넘기지 않았다. 과거 같으면 한 달 이상이 걸리는 사안. 결제시스템의 변화가 이런 속도를 가져온 것.

포스코 실무직원은 작년부터 기안서를 작성하면 상급자 모두에게 한꺼번에 전자결재를 올린다. 중간 상급자가 결재를 하지 않아도 최상급자가 결정하면 중간 상급자의 결재가 필요 없이 즉시 실행에 들어간다. 기아특수강 인수 참여 결정도 경영기획 조청명 팀장이 올린 결재를 회장이 바로 결정한 것.

포스코는 올해부터 경영기획을 분기별로 짜고 있다. 쌀 농사로 친다면 1모작에서 4모작으로 바뀐 것. 통합화된 정보기술이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하고 있어 가능한 일이다.

포스코 경영혁신 작업을 주도해 온 유경열 전무는 “디지털 기술로 30여년간 조직의 혈관에 쌓인 노폐물을 씻어냈다”며 “경영혁신에 2000억원이 들었지만 4년 만에 경비절감액만 4000억원에 이르고 무형의 효과는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밝혔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