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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생산현장의 ‘월드컵 후유증’

입력 | 2002-07-04 18:32:00


“월드컵은 끝났습니다. 더 이상 마음 들뜨지 말고 작업에 열중합시다. 여러분이 잠시 한눈을 팔거나 다른 생각을 하면 제품에 불량이 납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LG전자 서울 구로구 가산공장은 요즘 매일 오전 9시 작업을 시작하기 전 10분 정도 반별 조회를 한다. 휴대전화를 만드는 이 공장은 약간의 실수만으로도 불량품이 나올 수 있어 각별한 섬세함이 필요하다. 요즘은 특히 밤늦게까지 월드컵 경기를 본 후유증으로 밤과 낮이 바뀌어 조는 사람들이 생길까봐 생산라인 관리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월드컵으로 놀고, 주5일 근무에 들뜨고〓제조업이나 서비스업 할 것 없이 많은 기업에서 ‘월드컵 후유증’을 겪고 있다. 실제로 적잖은 직장인들이 “월드컵 생각이 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털어놓는다. 한국인으로서 ‘6월의 열광’은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월드컵 폐막 후에도 이런 느슨한 분위기가 이어진다는 데 있다.

L카드사의 K과장은 “월드컵 때 TV 보면서 실컷 즐겼고, 7월 이후로도 ‘뭐 화끈한 것 없나’ 하고 찾게 된다”고 말했다. H은행의 C과장은 “월드컵 기간에 고객용 TV로 축구를 계속 봤다. 업무시간의 적지 않은 부분을 축구 시청에 할애했다”고 털어놓았다.

한 의류업체 여직원은 “요즘도 김남일, 다비드 트레제게, 데이비드 베컴 등 ‘미남’ 축구선수들의 얼굴을 자주 떠올린다”면서도 “일손이 안 잡힐 때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금융계는 월드컵 열기에 이어 이번 주말부터 시작되는 주5일 근무로 들떠 있다. 직원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주말에 무얼 할까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근무시간에도 취미 레저 동호회를 찾아 인터넷을 뒤적이는 직원도 적지 않다.

정부 당국 역시 ‘일하는 분위기’가 자리잡도록 노력하기는커녕 월드컵 축제를 벌이는 등 ‘월드컵 후유증’에 속수무책이다.

▽원칙과 법이 통하지 않는 산업현장〓기업 경영인들은 월드컵과 정치 일정 등으로 사회 분위기가 느슨해지면서 산업현장에서 법과 원칙이 훼손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부 회사에서는 임금협상에서 노조가 회사 순익의 30%를 근로자에게 달라는 요구를 했고 회사측은 ‘경영권 침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주한 외국기업 대표자들은 최근 “이런 주장마저 받아들여진다면 한국은 더 이상 외자 유치를 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서강대 경영학과 박경규(朴庚圭) 교수는 “순이익의 사용처는 주주들이 결정할 사안으로 노조가 언급할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의 파업에 따른 경제적 비용도 적지 않다. 40일 이상의 전면파업이 이뤄지고 있는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은 회사의 직접적인 매출 손실만 3400여억원에 이르고 1700여개 협력회사에도 부담을 미쳐 지역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회사측은 보고 있다.

▽불안한 국내외 경제상황〓최근 국내외 경제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도 생산현장의 ‘월드컵 후유증’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요인으로 꼽힌다. 자칫 잘못하면 스포츠에 대한 열광이 경제에 더 주름살을 가게 한 남미의 상황이 한국에도 재현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분석도 있다.

6월의 우리 수출 실적은 지난해 6월보다 0.5% 늘어난 데 그쳤다. 전문가들은 지방선거와 월드컵으로 인한 조업일수 단축 등으로 6월 생산과 출하 실적도 부진할 것으로 예상한다.

하반기 경제는 더 불투명하다. 기업의 회계 투명성 위기로 미국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고 원화환율 하락(원화가치 상승)으로 한국제품의 수출경쟁력에도 ‘빨간불’이 켜져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김석중(金奭中) 상무는 “축구 4강이 곧 국가경쟁력 4강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라며 “지금은 모두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일할 때”라고 말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