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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초코파이보다 껌이 효자라니…”

입력 | 2002-05-29 17:24:00


“초코파이는 효자(孝子) 상품이 아니다.” 95년 9월 담철곤 동양제과 회장은 미국의 컨설팅업체 마스(MARS & CO)로부터 이 같은 보고를 받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사의 대표 브랜드 ‘오리온 초코파이’가 제품별 영업이익률에서 평균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껌의 영업이익률이 13%로 가장 높고 캔디(12%) 초콜릿(8.3%) 평균(5.3%) 비스킷(4.8%) 파이(4%) 스낵(-2.0%) 순으로 나타났다. 껌 캔디 등은 시장점유율이 낮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품목들. ‘스낵은 팔수록 손해’라는 지적도 믿어지지 않았다. 회사는 수십 년 간 효자와 불효자를 거꾸로 알고 대접해온 셈.

더욱 놀란 것은 120개 품목 중 상위 10개 제품이 전체 이익의 87%를 차지하고 하위 20개 품목이 영업이익의 40%를 감소시킨다는 점. 또 거래처의 50% 이상은 ‘거래할수록 손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런 결과는 당시 국내에서는 생각지도 못하던 ‘항목별 원가’(ABC·Activity Based Costing)를 계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동양제과도 회사 전체의 경영 상황만을 파악했지 각 제품의 원가와 수익을 산출할 줄 몰랐다.

동양제과는 ABC 회계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마스의 진단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판매액이 가장 커 수당을 많이 받던 판매사원이 ABC 회계로는 회사 기여도가 평균 수준이며, 판촉비를 집중 투입했던 거래처가 알고 보니 ‘팔수록 손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런 진단 결과는 공장 마케팅 영업 경리 등 모든 조직에서 변화를 불러왔다. 이익을 내는 핵심 제품에 기업 역량을 집중한 것.

송정섭 경영전략부문 상무는 “ABC 회계를 도입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회사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해왔는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경영 정교화’의 필수도구, ABC 회계〓ABC 회계는 비용이 들어가는 기업 내의 모든 행위를 세밀하게 분류해서 측정한다. 기존의 원가회계가 공장 단위로 매출이나 이익을 측정한다면 ABC 회계는 제품별 라인별 팀별로 원가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이 때문에 ABC 회계는 도입 초기에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동양제과의 경우 제품 한 개의 원가를 계산하는 데 원가항목이 125개나 된다.

ABC 회계의 진짜 위력은 세밀한 원가계산에만 있지 않다. 모든 활동에 대한 비용을 측정하기 때문에 회사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다.

봉희백 기획팀 과장은 “과거 관리회계가 청진기 하나에만 의존하는 전통적 진찰법이라면 ABC 회계는 자기공명영상(MRI)촬영, 혈액검사, 내시경 등으로 인체 내 모든 장기의 활동을 진단하는 현대의학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가 진짜 효자인가〓동양제과의 컴퓨터에서 영업사원 항목을 클릭하면 900명 영업사원별로 비용과 수익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별 인건비 외에도 각자 지출한 휘발유값 등 80여개 항목의 비용이 빼곡히 기록돼 있다.

95년까지는 매출실적이 높으면 최고의 영업사원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판매관리비를 적게 쓰면서 이익률이 높은 제품을 많이 파는 사람이 판매왕으로 대접받는다.

120개 브랜드 400여 종류의 제품도 마찬가지. 이제 400여 제품의 125개 원가항목이 정확하게 계산된다.

“8t 트럭에 스낵을 가득 실으면 매출이 800만원이지만 껌을 실으면 1억원이다. 차량 유지비, 재고 관리비까지 따지면 껌 한 트럭을 배달하는 것과 스낵 한 트럭을 배달하는 것은 원가에서 큰 차이가 난다. 과거에는 이런 차이를 몰랐다.”(안용준 비스킷 마케팅 팀장) 회사는 브랜드 수를 400개에서 70여개로 줄였다. 거래처도 10만곳에서 5만6000곳으로 줄여 나갔다. 그 결과 4.7%에 불과하던 영업이익률(95년)이 작년에는 8.7%로 크게 좋아졌다.

▽모두가 공장장〓ABC 회계는 공장의 일하는 방식도 바꿔놓았다. 매달 말 공장 전체의 매출액이나 불량률 정도만 파악됐지만 이제 제품별 원가는 물론 공정별, 라인별로 원가가 명확하게 드러난 것.

“라인별로 하루에 투입된 원재료와 부재료 비용, 인건비, 전기료 등 원가는 물론 제조이익까지 나오다 보니 팀별로 원가를 줄이려는 노력이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평소보다 이익이 적게 나오면 재료비가 많이 들어갔는지, 누가 일을 덜 했는지, 불량률이 많아서 그랬는지 명확하게 책임소재가 밝혀지다 보니 생산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장세칠 익산공장 업무팀장)

95년 매출의 55%를 차지하던 제조원가율이 작년에는 42.9%로 떨어졌다. 책임과 권한의 이양도 자연스럽게 일어났다.“수십 년 간 경험을 쌓은 공장장이라야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공장 내 여러 문제점이 ABC 자료에 나타나다 보니 과거 공장장이 하던 일의 상당부분을 작업반장이 할 수 있게 됐다.”(정일규 익산공장 공장장) 익산공장의 경우 근로자가 98년에 비해 절반인 200명으로 줄었지만 1인당 생산성은 같은 기간 3억5000만원에서 7억원으로 늘었다. 89명에 이르던 업무지원팀도 11명으로 줄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