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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나치에 묻힌 독일인 희생 '게걸음으로 가다'

입력 | 2002-05-24 17:57:00


게걸음으로 가다/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280쪽 8000원 민음사

1945년 1월, 붉은 군대가 독일로 육박해 들어왔다. 동부지역인 쾨니히스베르크와 단치히 일대의 독일인들은 아수라장의 피난길을 재촉했다. 과거 유람선이었던 구스틀로프 호도 기록상으로만 8000명에 달하는 피난민을 싣고 서쪽으로 출항한다.

1월 30일 밤, 러시아 잠수함의 어뢰 세 발이 배를 강타했다. 타죽고 밟혀죽고 빠져죽는 지옥도(地獄圖)에서 구명정으로 탈출한 사람은 1000명 남짓. 최소 7000여명의 민간인이 차가운 북해에 수장됐다. 타이타닉호 침몰 희생자의 5배에 달하는 숫자. 독일 현대사의 잊혀진 장(章)이었던 구스틀로프호 침몰 참사의 전모다.

199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가 이 사건을 햇볕 아래로 끌어냈다. 올 2월 독일에서 출간된 신작 장편 ‘게걸음으로 가다’.

출간 소식과 함께 예약 판매만으로 독일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계속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29일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중앙대에서 열리는 독일 통일 세미나에 그라스가 참석하는 것에 맞춰 이 책이 세계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됐다.

회화와 조각에도 재능을 자랑해온 그라스가 그린 '게걸음' 그림

‘국가적 금기를 깼다’(BBC) ‘그의 작품 중 최고’(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평론가) ‘위대할 정도로 정교’(슈피겔)… 등 이례적인 관심과 찬사는 이 작품이 노벨상 수상자의 ‘황금손’에 의해 쓰여졌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그라스는 자타가 인정하는 독일의 ‘좌파’ 지식인. 바로 그가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반인류적 행위를 고발한 것이다.

2차대전 중 독일인의 희생은 ‘파시즘에 동참한 대가이자 원죄’라는 시각 때문에 반세기가 넘어서까지 큰 목소리로 논의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그의 고발은 이례적이다.

주인공인 저널리스트 ‘나’는 구스틀로프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어머니의 체험담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란 인물. 동독에서 ‘당원’이 된 어머니를 떠나 일찍 서독으로 탈출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혼한 뒤 아들 콘라트와 서먹해져 마음의 짐이 되고 있지만, ‘나’의 어머니는 유독 손자를 아낀다.

독 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게재한 '게걸음으로 가다' 특집면. '독일의 타이타닉호'라는 기사제목이 보인다.

어느날 ‘나’는 구스틀로프호 사건을 다루는 ‘블루트초이게’(피의 증인)라는 웹사이트를 접하고 흥미를 느낀다. 아이디가 ‘빌헬름’인 운영자는 소련에 의해 죽어간 희생자를 추모하면서 제3제국에 대한 향수를 짙게 드러내는 신나치 성향의 인물. 유대인을 대변하는 ‘다비드’와 항상 채팅방에서 논전을 펼친다. ‘나’는 ‘빌헬름’의 말투와 자료를 통해 그가 다름아닌 아들 콘라트임을 직감한다. ‘빌헬름’ 아니 콘라트는 ‘다비드’와 가진 최초의 ‘오프라인’ 만남에서 그를 권총으로 쓰러뜨리고 마는데….

작품속에서 1945년의 비극은 할머니의 기억에, 손자의 행동에 차례로 전해져 오늘날의 비극에 그대로 계승된다. 이 ‘비극의 전수자’들이 가진 정치적 입장은 종종 모순된다. ‘나’의 어머니는 나치정권하의 모범생이었지만 훗날 동독에서 당원이 된다. 콘라트는 유대인을 증오하지만 이스라엘의 힘에 대해서는 찬양을 아끼지 않는다. ‘좌 대(對) 우’, ‘아리안주의 대 유다이즘’으로는 간단히 정의내릴 수 없는 ‘극단주의’가 계승돼온 것이다.

반면 이에 대비되는 ‘나’는 회의주의자이며 극단주의자로부터는 ‘줏대 없는 인간’으로 매도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작품속에서 작가는 때때로 직접 개입해 ‘나’와 이런저런 의견을 나눈다. ‘나’의 ‘회색주의’에 대한 작가의 동조에 다름아니다.

제목 역시 이런 함의를 짙게 나타낸다. ‘게걸음으로 가다’란, 우왕좌왕 옆으로 걸으면서 모든 측면을 되살펴보는 숙고인(熟考人)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일제히 앞으로’와 같은 단선적 사고나 극단주의야말로 언제든지 인간에 대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도화선임을 작가는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