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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佛 혁명이끈 농민들 집단의식 '1789년의 대공포'

입력 | 2002-05-03 17:35:00


◇ 1789년의 대공포 /조르주 르페브르 지음/ 최갑수 옮김/ 1352쪽 1만5000원 까치

213년 전 프랑스로 가보자. 오늘(5월 4일) 베르사유에서 전국신분회(‘삼부회’는 일본번역에서 온 것이니 고향으로 보내자) 대표들이 엄숙히 행진을 한다. 내일은 베르사유에서 왕이 전국신분회를 개최한다. 여기 모인 제3신분의 대표들은 6월17일 국민의회를 선포하면서 국민이 왕의 손에 있던 주권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시작한다.

그러나 왕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비록 국민의회를 선포한 제3신분 대표조차 아직까지 왕 앞에서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하던 터라서, 아직도 힘이 남아 있는 왕은 그 나름대로 혁명의 흐름에 저항한다. 왕과 국민대표 사이에 힘 겨루기가 시작된다. 왕은 파리 주위에 군대를 모으고, 국민의회는 제헌의회를 선포한다. 재무장관이었던 자크 네케르의 해임에 화가 난 파리 민중은 바스티유를 함락하고, 귀족보다는 평민이 더 많은 희망을 갖는다. 왕의 동생과 왕족, 대귀족, 귀족이 줄을 지어 프랑스를 등지고 떠난다.

그리고 7월20일부터 대공포가 시작된다. 그것은 프랑스의 다섯 군데에서 따로 발생하여 인근 지역으로 번지는 가운데 증폭되면서 거의 전역을 휩쓸었다. 먼 옛날부터 당시에 있었던 사건까지 모두가 대공포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기야 혁명이란 장기적 변화와 급격한 변화의 변증법이 아니던가? 대공포도 여러 가지의 원인을 갖고 있었다. 귀족계급의 음모, 수확에 대한 두려움, 농민을 약탈하는 오합지졸이나 비적 떼에 대한 두려움, 즉 한 마디로 수백 년 동안 농민들의 머리 속에 대를 물려가며 박혀 있던 두려움들이 대공포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대공포에 사로잡힌 농민은 무장했다. 시대적 분위기는 농민 편이었다. 농민은 귀족의 성관에서 부르주아의 저택에 이르기까지 공격했다. 그러나 8월4일 밤부터 8월11일까지 국민의회에서 민사와 조세의 평등, 특권과 관직매매제 폐지를 논의하여 결의하는 동안, 대공포는 수그러들었다. 부르주아 민병대가 농민 반란을 진압하고, 사태를 ‘정상화’시켰다.

20세기초까지 역사가들은 프랑스 혁명 초기의 흐름에서 대공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마침내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농촌사의 대가인 조르주 르페브르는 대공포의 원인, 확산과정, 결과를 ‘두껍게’ 묘사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 책을 한국말 번역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독자는 이로써 프랑스 혁명의 본질을 이해하는 복잡한 여정에서 이정표를 만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자는 르페브르의 안내를 받아, 1789년 혁명에서 대공포가 차지하는 위치를 찾을 수 있다.

20세기초, 경제를 중심으로 본 사회사가 19세기부터 주류를 이루던 정치사와 격렬한 ‘전투’에 휘말리고 있을 때 나온 이 책은 사회경제사에서 집단 정신자세(‘심성’도 쓰임새가 다른 일본말이다)의 역사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다. 정직하고 정확한 의사소통의 얼개를 갖추지 못한 사회에서 두려움의 실체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헛소문을 듣거나,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만 보고서도 얼마나 쉽게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킬 수 있는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광주 민주화 항쟁’을 떠올렸다. 민주화 과정에 특히 민감한 우리의 독자에게 이 책은 최근의 경험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일 수 있다. 주 명 철 한국교원대 교수·프랑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