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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MBC 임정아 PD "세상에 눈뜨게 해준 서태지는 내 친구"

입력 | 2002-03-17 17:21:00


고 3때였던가. 학력고사를 준비하던 나는 문득 의미없는 문자의 나열을 맹목적으로 외우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 학교 운동장 귀퉁이 쓰레기 소각장에서 몰래 교과서를 불태워버렸다. 그땐 무언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내 인생을 짓누르고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서태지가 등장했다. 그들은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라는 절절한 가사를 힘찬 ‘랩’에 실어 전달했고 공교육에 대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대학에 못 간 게 아니라 안 갔다”고 말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대학 진학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나는 1971년생 돼지띠다. 오전 오후반으로 나뉘어 한 반에 90명씩 가득 실은 교실에서 공부했다. 우리 세대는 개성이 없는 세대다. 요즘이야 게임만 잘해도 대학가는 세상이 됐다지만 우리 때는 소위 ‘날나리’라는 ‘개성파’(?) 학생들이 전교에 한 두명이었다. 머리가 좋으나 나쁘나 다른 재주가 있으나 없으나 오로지 공부에 매달렸다.

서태지는 색깔없는 우리에게 ‘X세대’라는 색깔을 입혀줬다. 대학 시절 학생회에서 활동했던 나는 골수파는 아니어도 운동권에 가까웠다. 사랑타령 일색이던 당시 유행가는 운동권에서 금지곡이었으나 서태지의 노래만큼은 운동권과 비운동권을 하나로 묶어주는 매개체였다.

방송국에 입사해 예능국을 지원한 것은 순전히 서태지란 인물을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팬이 아닌, 함께 일해보고 싶었다. 불행히도 내가 입사하기 바로 전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지금도 내 차에는 서태지가 발표한 음반을 모두 갖추고 있다.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면 그의 노래를 듣는다. 그의 음악은 나를 대학 3학년,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던 그 시절로 되돌려놓는다. 그때의 신선한 충격은 내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준다.

나는 우리 세대가 그를 배출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우리 세대에 ‘문화 대통령’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내게는 마치 친구같은 느낌이다. 그를 혹 만나게 된다면 한 마디를 꼭해주고 싶다. “짜식, 고맙다.”

MBC ‘일요일 일요일밤에-러브하우스’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