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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기자의 현장칼럼]최요삼 "불꺼진 링, 주먹이 운다"

입력 | 2002-03-07 14:30:00

싸움에 굶주린 거친 승부사라고나 할까.최요삼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20세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포츠스타를 꼽는다면 단연 알리와 펠레일 것이다. 권투와 축구는 그 원시적인 단순성으로 인해 전 세계가 문화의 차이를 넘어 함께 즐길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스포츠였다. 무하마드 알리를 다룬 할리우드 영화 ‘알리’가 최근 국내에서 개봉됐다. 비운의 복서 김득구 선수를 다룬 영화 ‘챔피언’도 제작되고 있다. 권투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과거 국민적 스포츠로까지 여겨졌던 한국의 프로복싱. 그러나 지금은 한국의 유일한 프로권투 세계챔피언이 최요삼 선수(28)라는 것을 아는 사람조차 많지 않다.

2일 서울 광진구 화양동 재래시장 입구 상가건물 3층에 자리잡고 있는 숭민권투체육관. 최 선수가 소속된 체육관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개발되다 만 공터에 들어선 것 같은 삭막함이 느껴졌다. 한쪽 구석에는 빨면 땟국이 흐를 것 같은 잠바를 입은 관장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중앙의 링은 누군가 올라서면 폴싹 먼지를 뒤집어 쓰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까지 했다. 시끄러운 댄스음악이 정신 산란하게 흘러나왔고 간혹 라운드를 알리는 종소리가 음악소리에 섞여 들렸다. ‘줄넘기 2∼3 라운드, 샌드백 치기 1∼2 라운드…’라고 권투 연습요령이 적힌 벽보가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몇몇 젊은 친구들이 줄넘기를 하거나 풋워크를 연습하고 있었다.

관장에게 명함을 건네자 그는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한참만에 자기 명함을 찾아 내밀었다. 뭘 좀 물어보려 했으나 음악 소리가 시끄러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만에 “세계챔피언이 연습하는 체육관이 뭐 이렇게 삭막하냐”고 물었다. 그는 퉁명스럽게 “권투체육관이 다 그렇지”라고 말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슬레이트 건물의 옥상이다. 바깥으로 나가보니 흘러간 시절의 영화 간판 같은 게 있다. 김득구 선수의 타이틀매치를 알리는 간판이었다. “저건 뭐냐”고 묻자 “얼마전까지 이곳에서 김득구가 나오는 영화를 찍었다”고 했다. 그 시절의 체육관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관장과 함께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관장은 더듬더듬 체육관의 역사를 늘어놓았다. 1974년 한국화장품 권투부 연습장인 한민체육관으로 시작했고, 99년 권투계의 대모인 심영자씨가 숭민프로모션을 만들어 본격적인 권투 부흥에 나서면서 그해 10월 17일과 30일 최요삼 백종권 등 두 세계챔피언을 한꺼번에 배출하고 숭민으로 이름을 바꿔 새로운 출발을 했다. 최 선수와의 인연을 묻자 그는 낡은 선수전적표를 꺼내 한참 뒤지더니 “95년 12월 요삼이가 한국챔피언을 뺏기고 실망했을 때 이곳을 찾아왔고 같이 운동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인 최 선수가 왕년의 세계챔피언 장정구씨와 함께 나타났다. 최 선수는 ‘제2의 장정구’라고 불린다. 둘 다 같은 체급에다 심영자씨를 어머니처럼 모셨고 이영래 코치 밑에서 트레이닝을 받았다. 장씨는 파마머리로, 그는 염색한 머리를 하고 다니는 탤런트 기질도 비슷하다. 장씨는 93년 WBC에 의해 지난 30년간 세계 복싱계를 빛낸 가장 위대한 챔피언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최요삼은 3차례의 방어전을 모두 KO승했다. 중량급에서야 흔한 일이지만 경량급 선수로서는 3차례의 방어전을 연속해서 KO로 이기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정작 그는 장씨의 스타일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형님은 화려하고 시원한 권투를 하고 나는 섬세하고 약은 권투를 한다.” 이 ‘겸손’의 말 속에는 맞으면서도 때리는 장씨의 파이팅과 좀처럼 맞지 않고 싸우는 유명우씨의 영리함을 모두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들어있다. 홍수환을 키웠던 김진호씨는 그런 그를 두고 ‘100년 만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최요삼 선수가 지난달 23일 일본 도쿄 베이NK홀에서 열린 3차방어전에서 도전자 야마구치 신고의 얼굴에 강펀치를 날리고 있다. 이날 경기에서 최 선수는 10회 TKO승을 거뒀다.

그는 실력에 비해 시대를 잘못 타고난 선수다. 최근 3차 방어전은 TV 중계와 스폰서가 잡히지 않아 3차례나 연기된 끝에 지난달 가까스로 열렸다. 6개월에 한번은 방어전을 가져야 하는데 13개월 만에 방어전을 가졌다. 이 때문에 그는 한때 타이틀을 박탈당할 위기까지 몰렸다. 프로복싱의 인기가 시들해진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겠지만 한국 프로권투의 여자 ‘돈 킹’ 심영자씨의 프로모션 활동마저 이를 극복하는데 실패했다. 숭민그룹을 끌어들여 숭민프로모션으로 재기한 심씨는 최 선수의 2차 방어전 직전에 숭민그룹 이광남 회장과 결별해 자금력을 잃었고 3차 방어전을 계기로 최 선수에게서 완전히 손을 뗐다.

권투의 시대는 가고 있는가. 과거 권투는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맨주먹으로 부와 명예를 손에 쥘 수 있었던 운동이었다. 권투는 그 단순한 구조와 거친 폭력성으로 인해 미숙련 혹은 반숙련 노동자의 굴뚝산업시대에 어울리는 스포츠였는지 모른다. 라디오와 TV가 막 대중화되던 시기에 그들에게 제공된 첫 스포츠는 권투였다.

미국에서 1960년대의 자의식으로 가득찬 고뇌하는 복서 알리가 명성을 날리기 훨씬 전에 잭 댐프시와 조 루이스 같은 국민적 권투영웅들이 있었다. 1921년 잭 댐프시가 프랑스의 조르주 카팡티에를, 1937년 조 루이스가 독일의 막스 슈멜링을 쓰러뜨린 경기는 당시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국가적 관심을 끈 이벤트였다.

국내에서도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박정희 정권 시절이야말로 권투의 황금기였다. 1966년 김기수 선수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한국 최초의 세계챔피언이 된 순간은 한국 스포츠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였다. 1974년 홍수환 선수가 적지인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아널드 테일러에게 승리를 거둔 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치던 모습도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장면이다. 1975,76년 유제두 선수와 일본의 와지마 고이치 선수의 타이틀을 뺏고 빼앗긴 숙명의 한일전에서는 모두들 가슴을 졸여야 했다.

그런 열기는 사라졌다. ‘알리’라든가 ‘챔피언’ 같은 영화는 과거에 대한 아련한 향수일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헝그리 복서의 성공 신화’도 사라졌다. 최요삼 선수도 그렇다. 아버지가 소위 ‘건강원’이란 것을 해서 집은 부유했다. 그는 “고기 먹고 자란 놈이 맷집도 좋아 김치 먹고 자란 놈보다 권투를 잘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용산공고 2학년 시절 전국체전에서 3학년생을 다 때려눕히고 금메달을 땄다.

권투의 이미지가 변하고 있다. 최씨의 매니저인 전광선씨는 “일본에서 가본 한 체육관은 3층 건물 전체를 다 쓰는데 그중 여성용 연습장이 한층을 따로 차지할 정도로 권투가 남녀를 막론하고 인기가 높은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일본도 1인당 국민소득(GNP) 1만달러 시절에는 권투의 인기가 시들해졌으나 1만5000달러 시절에 접어들면서는 권투가 생활스포츠로 새롭게 자리잡았다. 권투체육관도 미국식으로 ‘짐(GYM)’이라고 부르는 곳이 많다. 권투의 매력을 아는 층도 두꺼워져 현재의 프로권투시장을 지탱하고 있다. 중량급 프로권투시장이야 미국이 단연 앞서지만 경량급 프로권투시장은 일본이 낫다는 말도 있다.

체육관을 나오다 보니 벽면에 ‘샌드백을 치면 분당 7.5㎉ 소비’라고 쓰여 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로 몸 만들기 차원에서 권투를 한다. 날아갈 듯 날렵한 복싱 슈즈를 신고 영화 ‘알리’ 속의 윌 스미스처럼 빠른 풋워크를 구사하는 모습들은 보기에도 매력적이다. 수십년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삭막한 체육관과 그 속의 젊고 세련된 권투애호가들, 한국 권투의 과도기적 모습을 보고 있는 듯했다.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