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야 하는 판은 반드시 이긴다.’
적어도 이창호 9단에게는 이 공식이 성립한다. 지난 1일 중국에서 열린 제2회 농심신라면배 최종국. 이 9단 개인에게는 1000승, 한국팀에겐 농심배 우승이 걸려있던 이 대국에서 그는 공식처럼 승리를 따냈다. 중국 바둑 관계자는 “단체전에선 이 9단만 남아있으면 중국 기사 10명도 소용없다”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그는 지난해 ‘통산 100번째 타이틀 획득’이 걸려있던 LG배 세계기왕전과 ‘한해 상금 10억원 돌파’가 걸려있던 명인전에서 모두 2연패후 3연승으로 거두며 불패 공식을 입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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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기전사를 새로 쓰고 있는 그의 최근 얘기가 궁금했다.
-1000승을 거두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대국은.
“90년 최고위전에서 조선생님(조훈현 9단)에게 처음 타이틀을 따낸 바둑이다. ‘드디어 타이틀을 땄구나’하는 생각에 속으론 무척 흥분했다. 내용은 엉망이어서 어떻게 이겼는지 스스로도 신기한 바둑이었다.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50수 언저리까지는 기억이 난다.”
-프로기사로서 한번도 좌절한 적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그렇진 않다. 88년인가 89년인가, 신예 프로기사와 아마 강자와 호선으로 대결을 벌이는 기획이 있었는데 그 때 안관욱 6단(현 프로 4단)에게 진 적이 있다. 당시 내 바둑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내려 한동안 충격에 빠져 있었다.”
-이 9단은 16년간 바둑 인생에서 누릴 만한 것은 거의 다 누렸다. 아직도 바둑이 재미있나.
“(웃으며)물론 처음과 똑같지는 않다. 기복이 있는 것 같다. 성적이 안좋을 수록 바둑이 더 재미있다.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이겨야 하는 판은 꼭 이긴다’는 것이 주위의 얘기인데.
“스스로 그렇게 느껴본 적은 없다.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부담이 생겨 판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2000년 삼성화재배에서 저우 9단에게 진 것도 그 때문인 듯 하다. 꼭 이겨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게 작용할 수도 있고 나쁘게 작용할 수도 있다. 반반인 것 같다.”
-이번 농심배에서 저우허양(周鶴洋) 9단과의 바둑도 부담이 컸을 것 같은데.
“저우 9단에게 3번이나 지긴 했지만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전에 얼마나 이겼나 졌나는 별로 상관없다. 항상 ‘그 바둑’이 중요하다.”
-요즘 바둑외의 세상일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붙임성이 없어 인간관계를 폭넓게 맺지 못한다. 아는 사람을 따라 바둑 아닌 다른 모임에도 나가봤는데 한두번에 그치고 말았다. 이 분야만큼은 내 수읽기가 아직 부족하다. 운전면허 등도 따고 싶은데 워낙 게을러서….”
-컨디션은 어떤가.
“빈 바둑판을 앞에 두면 바둑판이 밝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땐 신수도 시도해보고 싶고 수도 잘보인다. 반면 어둡게 느껴질 때는 뜻대로 안풀리는 경우가 많다. (말끝을 흐리며)요즘은…잘 모르겠다.”
-이 9단이 생각하지 못했던 수를 가장 많이 두는 기사는 누구인가.
“(웃으며)10명은 된다. 뜻밖의 수를 당하면 대국 당시엔 당혹스럽긴 하지만 나중엔 한수 배웠다는 느낌이 든다.”
-보통 어떨 때 장고를 하나.
“장고를 할 때는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을 때다. 보통 한번 장고하면 한가지 변화에 40∼50수씩을 읽는데 그래도 안좋으면 망설이다가 시간을 보낸다.”
-45기 국수전 도전자가 돼 조 9단과 대결하게 됐는데.
“아직도 ‘국수’라는 칭호가 가장 마음에 든다. 꼭 우승하고 싶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