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나는 이발사를 가려왔다. 아픈 과거사들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땐 등교 직전에야 두발 검사 생각이 나 거울을 봐가며 내 손으로 가위질을 했다. 그날부터 나는 ‘꺼벙이’라고 불렸다. 기계충에 먹힌 듯이 머리 한쪽이 뜯겨 나갔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팠던가.
고교 2학년 때는 두발자율화가 됐다. 이발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다 졸았는데 누군가 깎기 시작했다. 눈 떠보니 1시간가량 ‘깎였던 것’ 같다. 이발사가 어린 조수한테 ‘실험용’으로 깎게 한 것이다. 다음날 선생님은 이렇게 고함쳤다. “머리 기르라고 하니까, 왜 또 박박머리야! 반항이야?” 말도 못하고 미칠 지경이었다.
입사 면접 전날 머리를 짧게 깎아 달랬더니 해병대원처럼 만들어놓은 이발사도 있었다.
석달 전 머리를 자르러 갔더니 또 조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나는 손을 저었다. 두달 전 찾아 갔더니 그 조수가 비굴할 정도로 웃으며 다가섰다. “안돼요. 안돼!”
이젠 나도 나이가 들었다. 차츰 기회를 베풀어야 할 때가 아닌가. 나는 한달 전 머리가 좀 길어지자 곧바로 단골 이발소로 찾아갔다.
“오늘은 저 사람!”
조수는 감격해 하는 눈치였다. 나는 믿어보자며 눈을 감았다. ‘생체 실험’이란 말이 머리를 떠돌았다. 눈을 떠보니 그런 대로 됐는데, 나, 참, 귀밑머리가 짝짝이었다. 시치미를 뗀 채 “잘 됐는데요”하자, 조수는 “뭘요”하고 쑥스러워했다.
오늘 그 이발소에 들른 직장 동료 하나가 “머리 괜찮지?” 하고 물어왔다. “누가 깎았어?” “그 왜, 젊은 친구. 잘 깎는 것 같아” 조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 퇴근하면서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누군가를 키워주는 것’, 그건 이상한 충만감을 가져오게 하는 것 같다.
홍은태 36·회사원·서울 영등포구 양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