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변화시킨 열 가지 지리학 아이디어/ 수잔 핸슨 엮음 구자용 외 옮김/ 352쪽 1만4000원 한울아카데미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구라파국여지도(歐羅巴國輿地圖)’를 보고 조선인들이 처음 놀란 것은 1603년이었다. 그리고 이 해는 조선인이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대해 근본적 회의를 하기 시작한 해로 기록된다.
놀랍게도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중국 못지 않게 넓은 땅 덩어리가 여러 개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은 바로 서양에서 들여온 이 지도들이었다. 물론 그 때까지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믿음을 확고하게 해 줬던 것도 역시 또 다른 지도들이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지도는 종종 대단히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회의 가치관 및 이데올로기와 깊이 결부돼 있다.
지리학의 가장 전형적 표현방식인 지도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단순화 조직화해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역사학자가 시간 속의 사건들을 구분하기 위해 ‘시대’를 이용하듯이 지리학자는 공간 속의 사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지역’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시대와 지역은 모두 복잡한 사건에 질서를 부여해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편의적 개념이다.
이 책은 서양 지리학의 발달과정에서 축적돼 온 연구성과 가운데서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열 가지 아이디어를 소개한다. 특히 각 분야에 정통한 12명의 학자가 집필하고 미국 지리학회장을 지낸 클라크대 수잔 핸슨 교수가 편집했다는 점에서 신뢰를 준다.
각 장에서는 지도, 기상도, 지리정보시스템, 환경변화와 인간, 공간조직과 상호의존성, 장소감 등 열 가지 지리학적 아이디어에 대해 그 기원과 전개과정, 그 핵심내용과 학술적 사회적 영향 등을 설명한다. 이를 통해 지리학의 주요 아이디어가 일상적 삶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다.
예컨대, 지도가 이해의 편의를 위해 불확실성에 대해 눈을 감고 뚜렷한 경계선을 그려 단순하고 고정적인 지역구분 의식을 심어왔다면, 한창 발전도상에 있는 지리정보시스템은 공간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이뤄가고 있다. 지리정보시스템은 시공간에 걸친 연속적 변화와 불확실한 경계에 대해 과거보다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 장소에서 살아가며 문화를 공유함으로써 형성되는 정체성인 ‘장소감’은 인간을 한 지역에 연결시키는 동시에 보다 넓은 세계로 연결시킨다. 그러나 역으로 다른 장소와 사람들로부터 그를 분리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지리학의 성과와 그 영향력에 대한 설명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책을 만들게 된 지리학자들의 자기반성적 자세이다. 이들은 이 책을 통해 지리학이 이 세상에 어떻게 공헌해 왔고, 또한 지리학적 사고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켜 왔으며, 앞으로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려 했다. 자기 학문의 현실적 기능과 그 가치에 대한 반성 위에서만 학문은 의미 있는 발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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