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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샐러리맨 3중고…"사는게 아녜요"

입력 | 2000-11-29 18:36:00


A은행 구모씨(32)는 최근 6개월간 하루라도 편하게 쉰 날이 없다. 회사는 다행히 금융구조조정 대상은 아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발표되는 업무 지침에 따른 스트레스와 한달에 서너차례씩 치러야 하는 시험에 녹초가 돼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특히 승진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따야 하는 파이낸셜플래너(FP)자격증 공부와 퇴근 후의 통신강좌, 인터넷 강의까지 의무적으로 듣다보면 사는 게 아니다.

요즘 샐러리맨은 너무 힘든다. 기업에 대한 2차 구조조정으로 △실직에 대한 불안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업무 강도 △퇴직 후에도 비전이 없는 미래의 불투명성 등 ‘3중고(苦)’가 샐러리맨 사회 전반에 불안과 무기력 증후군을 확산시키고 있다.

▽다시 시작인가?〓외환위기 이후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왔던 B사 김모 팀장(42)은 요즘 일손을 놨다. 최근 관리담당 상무로부터 팀원 절반을 퇴직시켜야 하니까 ‘살생부’를 작성해오라는 통보를 받은 것. 팀의 운영경비를 절반으로 삭감하고 임금이 뭉텅이로 깎이는 아픔은 견딜 수 있어도 제 손으로 후배를 거리로 내모는 일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김팀장은 현재 다른 일자리를 찾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다. 40이 넘은 나이에 마땅히 옮길 만한 회사도 없지만 ‘만만했던’ 벤처기업마저 줄줄이 도산하는 상황이라 그를 받아줄 곳을 찾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헤드헌팅업체들에 따르면 이달 들어 구인의뢰보다 구직의뢰가 늘어나는 역전 현상이 시작됐다. IT업계의 불황에도 원인이 있지만 도산한 기업은 물론이고 살아남은 기업들 대부분이 강도 높은 2차 구조조정을 시작한 여파다.

▽미래가 없다〓퇴직자들이 갈 곳은 마땅치 않다. 특별한 기술이나 탄탄한 경력이 없을 경우 재취업 자체가 힘들 뿐만 아니라 인력을 구하는 기업들도 대부분 경력자나 숙련된 엔지니어를 찾고 있기 때문.

퇴직자들이나 퇴직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소자본 창업도 전망이 밝지는 않다. 한국프랜차이즈협회 이경우(李庚雨)사무총장은 “조만간 개최할 창업박람회에 대한 문의전화가 하루 200여통 이상 걸려오고 있다”며 “그러나 창업을 한다해도 성공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말했다.

▽차라리 떠나자?〓이런 상황에 지친 사람들이 찾는 돌파구는 해외 이민. 정치에 대한 불신과 환멸, 경기 악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살이라도 젊을 때 외국으로 나가자는 추세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의 해외이민자는 7125명이었으며 이중 30대 취업이민이 3623명으로 절반이 넘었다. 전체 이민자 중 취업이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97∼99년 3년간 26.3%, 27.2%, 41.6%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

연세대 심리학과 이훈구(李勳求)교수는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불안감은 외환위기 직후와는 또다른 양상”이라며 “당시에는 위기를 극복해보자는 의지라도 있었지만 최근의 양상은 국가 전반에 대한 환멸과 절망감에서 비롯된 불안감으로 문제는 더 심각하다”고 말했다.

dreamlan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