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후 작업실로 돌아온 칸딘스키는 거꾸로 놓여진 자신의 미완성 그림을 보고 뭔가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거꾸로 놓여진 캔버스 위에 펼쳐진 것은 무의미한 형상과 색채의 덩어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무질서한 색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느낌에 그는 완전히 압도당한다. 마침내 그는 그림이 결코 현실을 닮을 필요가 없으며 선과 색이 만들어 내는 나름의 세계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그림의 세계와 현실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평범한 사실을 20세기에 들어서야 서구의 화가들이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가 어처구니없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개념의 세계와 현실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철학자들이 인정하기까지는 그보다도 몇 십 년이 더 걸렸다. 개념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개념에 바탕을 둔 학문의 세계도 현실 세계와 다름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런 차이의 인정은 곧 학문의 붕괴라고 생각됐다.
이 책은 그런 생각이 터무니없음을 잘 보여준다. ‘차이와 타자: 현대 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이라는 제목이 드러내듯이, 저자는 ‘차이’와 ‘타자’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반성을 통해 타자를 배제하고 동일성의 토대 위에 학문을 구축하려던 근대인들의 사고 패턴을 철저하게 공격한다. 물론 근대적 사유에 대한 이런 비판은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고 이제는 다소 진부해진 주제가 됐다. 하지만 저자는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탐색과 이론적 성찰을 통해 자칫 낡아빠진 듯 보일 수 있는 문제를 새롭게 정리했다. 또한 저자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의존하고 있는 들뢰즈의 사상도 다른 사상가들과의 비교를 통해 입체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국내에서 아직 들뢰즈 사상에 대한 포괄적 연구 성과가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은 거의 최초의 본격적인 들뢰즈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칸트나 사르트르, 레비나스, 프루스트 등에 대한 저자의 탄탄한 소화력도 이 책의 빛을 발하는 데 한 몫을 한다.
하지만 저자도 말했듯이 들뢰즈가 주석가로 변장하고서 다른 철학자의 텍스트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 결국에는 그것을 파괴하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던 반면, 아쉽게도 저자는 아직 그런 파괴자의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다.
▼'차이와 타자'/ 서동욱 지음/ 문학과지성사/ 396쪽, 1만4000원▼
박영욱(고려대 강사·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