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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독자의 편지]생사확인이라도 해줬으면…

입력 | 2000-08-14 18:52:00


▼서울 오시는 형님과 부모님 산소서 실컷 울었으면▼

서울에 오시는 형님(서재영·70)의 소식을 처음 들었던 7월16일 밤,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그랬겠지만 저희 남매도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동해안의 어느 해수욕장 민박집에서 가까운 이웃과 함께 있었다. 밤 11시반경 서울에서 소식을 알려온 누님의 목소리는 울부짖음에 가까운 절규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던 형님이 북에 살아 계신다니 너무 놀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어려서 눈여겨봤던 빛 바랜 사진을 찾아 봤다. 형이 강경상고 졸업반 학생으로 보통고시에 최연소 합격하고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그런 형은 나의 성장기에 하나의 목표이자 등불이었다. 그런 수재가, 종갓집 장손인 형이 가족을 남겨 두고 거기에 가 계셨다니. 별 말씀없이 지내신 아버님의 속은 어떠했겠는가. 먹고 살기 어렵던 그 시절에 아들이 행여나 돌아올까 밥 한 그릇씩을 남겨두시던 어머님의 애절한 기다림은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내 아들 딸의 사진을 보며 이 아이들이 없다면 세상의 온갖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니 이제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그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15일 서울에서 만날 형님과 부모님 산소에서 그저 실컷 울어보고 싶다.

서 재 철(충남 논산시 화지동)

▼평양서 여동생 만나면 50년 설움 씻기겠지요▼

얼마나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가. 그래도 죽기 전에 이렇게 만나게 되니 얼마나 행운인가. 황해도 황주에서 남으로 내려오던 일이 눈에 선하다. 중학생이던 나는 학교에 가려고 아침을 먹던 중이었다. 국군이던 친척이 그 날 아침 급히 집으로 와서 피하자고 했다. 2남3녀 중 위로 두 형제만 한 열흘 피해 있다가 오자는 것이었다. 열흘이면 돌아갈 줄 알았는데 50년이 됐다.

북한에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된 세 여동생과 형수를 만나러 간다. 방북단 최종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형언키 어려운 감정이 복받쳤다. 부모님은 살아 계시기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그래도 다시 못 뵙는 것이 한이 된다. 살아 계실 때 한번이라도 뵈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동안 가족들이 생각나면 너무나 힘들었다. 울적할 때는 한 잔 술로 마음을 달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제 그런 아픔의 50년 세월을 보내고 여동생들을 만나게 되니 너무나 가슴이 벅차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김 해 진(서울 중랑구 면목동)

▼명단서 빠졌지만 누님 살아계시다니 고맙습니다.▼

내 고향 경기 개풍은 중면이다.임진각에서 쌍안경으로 보면 보일 듯 말 듯하다. 이렇게 지척인데도 50년 동안 가지 못하고 있는 심정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1950년 6월25일 바로 그날 오후 3시경 초등학생이던 나는 집에서 놀다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남으로 내려 왔다. 38선 바로 밑에 있던 이모네 집으로 피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모네 집으로 가는 길이 워낙 북새통이어서 못가고 다시 38선 이남에 있던 누님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누님은 가족이 걱정돼 오히려 북으로 올라갔고 그렇게 나는 가족과 헤어졌다.

내려와서 고생도 숱하게 했다. 그 고생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그 세월 동안 가족이 그리웠던 심정은 또 어떻게 말로 다하겠는가. 그 가족의 생사를 이번에 확인했다. 3남2녀 중 누님 한 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다. 방북신청을 하고 방북자 1차 명단에는 포함됐으나 최종 명단에서는 빠졌다. 하지만 누님이 살아 계신 것을 확인한 것만도 다행이다. “누님, 50년 헤어진 세월 동안 살아 계셔서 정말 고맙소. 이번에 비록 최종 명단에서 빠지기는 했지만 다른 고령자에 비하면 60대인 나는 아직 젊은 편이지 않습니까. 다음에는 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누님을 볼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장 홍 진(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생사확인이라도 해주면 이토록 서운하진 않으련만▼

50년 전 고향인 황해도 벽송을 떠나던 날 새벽 동네 어귀에서 6남매 중 외둥이인 이 아들을 말없이 바라보시던 어머니.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어언 50년이 흘렀다.

남북이 오가며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지만 아직도 어머니와 누이들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움에 밤마다 잠을 못 이루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금방이라도 이산가족이 모두 상봉하게 될 것 같은 희망에 부풀어 뛰는 가슴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왜 1000명, 1만명이 아니고 100명이란 말인가. 최소한 1000명은 될 줄 알았는데 겨우 100명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 서운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생사확인이라도 해줘야 하지 않을까. 답답한 마음에 남북이 서로의 언론을 통해 이산가족의 인적사항을 모두 공개하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고 싶다. 그렇다면 최소한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에 가족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에게 혹시 내 고향 출신이 있다면 소식이라고 듣고 오기를 부탁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안됐다. 하지만 금강산에 이어 개성도 곧 문을 연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성과 가까운 우리 고향에도 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여 병 구(서울 성북구 종암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