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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상봉 D-4]월북시인 오영재씨의 思母詩

입력 | 2000-08-10 18:55:00


▼월북시인 오영재씨의 사모시 '아! 나의 어머니'▼

―40년 만에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생존해 계시다니/ 생존해 계시다니/ 팔순이 다 된 그 나이까지/

오늘도 어머님이 생존해 계시다니/ 그것은/ 캄캄한 밤중에/ 문득 솟아 오른 해님입니다/ 한꺼번에 가슴에 차고 넘치며/ 쏟아지는 기쁨의 소나기입니다/ 그 기쁨 천근으로 몸에 실려/ 그만 쓰러져 웁니다/ 목놓아 이 아들은 울고 웁니다/ 땅에 엎드려 넋을 잃고/ 자꾸만 큰절을 합니다…

※오영재씨가 91년 미주 동포 문인들이 발행한 잡지 ‘통일예술’ 제 2집에 발표해 어머니에게 전달된 시

▼어머니 곽앵순씨(95년 사망)가 아들 오영재씨에게 보낸 편지▼

오매불망 못 잊는 북에 있는 내 아들에게!

언젠가 이 편지가 네 손에 갈 줄 믿는다. 언제나 편지라도 주고받으며 전화로라도 대화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한량없이 궁금하다.

내 팔순 때는 너희 말대로 잔 드릴 때 형재(오영재시인의 동생)가 ‘오영재’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인사를 하였단다. 막내동생 영숙이가 ‘늙지 마시라’는 네 시를 낭독해서 하객들의 눈시울을 적시게도 했단다. 형제들이 또 네가 즐겨하던 ‘옛날의 금잔디’라는 노래도 불렀단다. 그 축하식이 온통 너를 사모하는 식이 되었다. 나는 네가 늙지 말라 그랬는데 허리도 굽지 않고 눈도 귀도 정상이니 걱정마라. 너 만날 때까지 살아있을 터이니 몸조심하고 건강하게 만나기 바란다.

네 형제들도 모두 교육자고 너 역시 시인이지 않니! 너는 더욱 훌륭한 시인, 후세에 영원히 남아있을 훌륭한 시들을 써라. 가난한 가정에서 부모가 뒷바라지를 해준 것도 없이 자력으로 이룩했으니 정말 장한 일이지. 너는 더구나 고독 단신으로 사고무친한 곳에서 고독과 고통과 슬픔과 배고픔과 헐벗음과 이 모든 것을 이겨냈으니…. 고진감래라고 고생이 크면 성공도 큰 거란다. 교만하지도 말고 온유하고 겸손하여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덕을 세워라.

우리 모자 할말이야 여산여해지만 만날 때까지 참아내자. 바다로 먹물 삼고, 하늘로 두루마리 삼아도 다 못 쓰겠다. 내가 다시 한번 부탁은 술 적게 마시고 몸조심하여라.

남에서 엄마가 북에 있는 아들에게

1993년 5월 25일 모시

*오영재씨 어머니 곽앵순씨(95년 사망)가 생존해 있을 때인 93년 미국의 인편을 통해 아들에게 전달한 편지 원본과 내용 요약

▼오영재씨는 누구?▼

10여년 전 어머니의 생존 사실을 알고 ‘넋을 잃고 목놓아 울었던’ 둘째 아들.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시구로 절절히 표현한 북의 계관시인 오영재(吳映在·65)씨.

15세이던 50년 전남 강진 고향마을에서 의용군에 들어가 월북한 그는 북한의 대표적 시인이 돼 15일 북측 이산가족상봉단으로 서울에서 혈육과 만난다.

그러나 오씨의가 ‘내가 한 해에 두 살씩 먹더라도 더 늙지 마시라던’ 어머니 곽앵순씨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 만날 때까지 살아있을 터이니…’라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95년(당시 83세) 세상을 떠났다.

노력영웅 칭호에다 김일성훈장까지 받은 오씨는 ‘아, 나의 어머니’ ‘늙지 마시라’ 등의 사모시(思母詩)와 ‘분렬의 장벽은 무너지리’ ‘자리가 비어 있구나’ 등의 시로 이산과 분단의 아픔을 표현했다.

남에는 형 승재(承在·67·한남대 명예교수)씨와 동생 형재(炯在·63·서울시립대 교수) 근재(勤在·60·홍익대 교수) 창재(昌在·57·사업)씨 등 6형제가 있다.

형재씨는 “형님이 시인이니 만큼 남쪽의 시인 언어학자 등을 소개해 통일조국을 위해 뭔가 기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이번 만남을 보다 뜻깊게 하는 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