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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령기자의 책·사람·세상]'인터넷 헌책방'

입력 | 2000-06-09 19:03:00


책 한권의 수명은 얼마일까? 내 서가의 경우 마흔살을 넘긴 ‘데미안’을 먼저 꼽게 된다. 사실 나는 이 책의 세 번째 주인이다. 외삼촌이 읽다가 맨 뒷장에 ‘입학을 축하하며’라는 궁서체 메모를 더해 스무살 어머니에게 선물했던 것을 중학생 시절 허락없이 대물림했던 것. 어린 나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문장 밑에 몇 번씩 결연히 밑줄을 그어가며 ‘폭발 직전’의 사춘기 감성을 다스렸던가.

헌 책방을 순례하는 사람들은 책 속에 남은 그런 흔적을 ‘책과의 대화’라고 표현한다. 전 주인의 심중이 드러난 한 줄의 메모, 밑줄긋기야말로 어떤 헌 책의 고유한 고고학적 연대기이자 숨결이라는 것이다. 손자국 하나 없는 새 책에서는 찾을 수 없는 묘미다.

늘 고여있는 것같은 헌 책방이 격렬한 추격의 장(場)이라는 것도 경험자만이 아는 스릴이다. 헌 책 애호가들이 흔히 도전하는 것이 ‘전집 1질 모으기’.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듯 이 책방 저 책방에서 책을 사서 짜맞추다 보면 대개 마지막 한두권이 ‘난관(難關)’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자들과 추격전을 벌이기 때문이다. 금방 보고 돌아섰던 책이 몇시간 사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을 몇 번 겪다보면 수집가들은 ‘얼굴없는 경쟁자’에 대한 전의에 불타게 된다.

그런데 이런 헌 책방들이 디지털바람으로 요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인터넷 판매를 하는 헌책방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헌 책들의 서지사항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것이 이유다. 나만의 노하우로 숨어있는 책을 찾던 ‘발굴자’들에게는 게임의 끝을 알려주는 재미없는 변화지만 한국의 빈약한 기록문화에는 이만저만 가능성이 큰 자료보탬이 아닐 수 없다.

현재 20여곳을 헤아리는 국내 인터넷 헌 책방(www.kungree.com 중고도서 목록 참조)에서 자세한 분류목록을 자랑하는 고구마(www.goguma.co.kr). 84년부터 서울 금호동 주택가에서 헌 책방을 운영해온 이범순사장(45)이 보유서적 20여만권 중 4만여권을 정리해 마련한 이 목록에서는 ‘초판본, 절판본’ ‘만화,애니메이션’ 심지어 ‘졸업앨범, 졸업장’까지 발견할 수 있다. 이사장은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한국 십진분류법등을 참조하긴 했지만 헌 책방에는 헌 책방만의 룰이 있다”고 강조한다.

73년 정음사에서 세로쓰기로 펴낸 김동리의 ‘등신불’은 3000원, 59년 민중서관에서 펴낸 염상섭의 ‘삼대’는 2000원…. 이런 목록을 훑는 동안 특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재고없음’이다. 예컨대 한국철학자 박종홍이 72년 박영사에서 펴낸 ‘자각과 의욕’은 9일 현재 ‘재고없음’. 당장 살 수는 없지만 이런 책이 있었고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것만은 확인해준다. 길창덕의 ‘선달이 여행기’같은 오래된 만화가 ‘무게있는’ 책들과 더불어 ‘고전’으로 대접받는 것도 헌 책방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헌책방 순례자에서 1인 출판사 겸 헌책방 주인(www.sinhanmedia.com)으로 변신한 신한미디어 박노인사장(50). 이미 ‘일본 고서점 그라피티’등을 번역해 헌 책의 소중함을 알려온 그는 홈페이지에 저자, 출판사는 물론 발행일과 초판인지 증보판인지를 밝혀주는 ‘판’개념까지 기입한 서지사항 기록방법을 모델로 제시해놓고 있다.

책속에 담긴 지식은 흐르는 물과 같다. 전시품으로 서가에 꽂혀있을 때는 박제돼 있다가도 필요한 사람들 사이로 흐르면 다시 살아 숨쉬게 된다. 인터넷 헌 책방에 주목하는 것도 종이책에 담긴 지식을 전파하는 또다른 물꼬가 될까하는 기대 때문이다.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