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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옛그림읽기]정선 作 '금강내산도'

입력 | 2000-06-06 19:47:00


정선의 ‘금강내산도(金剛內山圖)’

연꽃 한 송이가 탐스럽게 피었다. 금강산 1만2000 봉우리가 막 버는 꽃봉오리인 양 눈부시게 환하다. 줄지어 선 흰 화강암봉이 꽃 이파리라면 그 사이로 깊게 음영을 드리운 계곡들은 마치 겹겹이 포개진 틈새의 그늘 같다. 흙산은 왼쪽 위에서 아래로, 다시 오른편으로 넓게 에워싸면서 연잎처럼 꽃을 안았다. 흙산과 바위산이 음과 양으로 서로 의지해 편안한데, 양산(陽山)은 더욱 날카롭고 음산(陰山)은 그만큼 부드럽다.

정녕 놀라운 건 산 전체를 어안(魚眼) 렌즈로 본 듯 둥글게 휘어 부채 중심에 모은 점이다. 정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금강산 온갖 봉우리를 한 손에 쥐어보자는 기겁할 발상을 했을까?

금강산은 겨레의 혼이 숨쉬는 영산(靈山)이다. 수려한 금강산은 한민족의 자랑이요, 국토애의 원천이다. 겨레가 너무나 사랑하고 외경했기로 산 이름도 철 따라 달라진다. 새싹 트고 향기로운 꽃이 만발한 봄에는 금강산(金剛山)이다가, 녹음이 짙푸르게 깔리는 여름이 오면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이 되고, 다시 가을 깎아지른 검은 절벽에 새빨간 단풍이 온 산에 핏빛 불을 지르면 풍악산(楓岳山)이 된다. 그리고 한겨울 차가운 암봉만이 뼈다귀처럼 우뚝 서서 새하얗게 눈을 이고 있는 장관을 일러 개골산(皆骨山)이라 부른다.

옛사람들의 눈길을 따라 천천히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시선을 옮겨 본다. 처음 눈에 뜨이는 산 둘은 유난히 먹빛이 짙다.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처음엔 하늘 반 땅 반이다가 점차 올라가면서 산은 가파르고 하늘은 가까워져 급기야 최정상 비로봉에 이르자 하늘이 머리에 닿겠다. 메다꽂듯 내리찍은 암봉의 필획들은 빠르고 예리하고 각지고 중첩되니, 봉우리마다 변화무쌍 하나도 같은 모습이 없다. 또 어떤 곳은 붓 두 자루를 한꺼번에 쥐고 그었는데 짙고 옅은 농담의 변주가 절묘하다. 골짝 사이로 아스라히 먼 곳에 절집이 어른거린다. 이렇게 절경을 빚어내는 솜씨는 조물주에게나 비길 수 있으리라.

정선은 금강산을 사랑해서 평생 셀 수 없이 많은 그림을 남겼지만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단연 이채를 띠는 걸작이다. 저 짙푸른 흙산의 녹음 속 오른편 끝에 보이는 장안사(長安寺)의 무지개 다리는 유달리 청량한 느낌이 든다. 단오 무렵이면 선인들은 갖가지 부채를 만들어 썼다. 부채그림이란 그 얼마나 멋들어진 것인가? 간편하게 명화(名畵)를 손에 쥐고 다니다가 어디서나 이따금씩 척, 하고 펼쳐본다. 그리고 선선한 바람결을 그윽이 음미한다. 이 부채를 들고 금강산 1만2000 봉을 한 손에 틀어쥐어 솔솔 부친다면 아마도 봉래산 향내에 취하여 그대로 신선이 될지도 모른다.

오주석(중앙대 겸임교수)josoh@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