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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오래된 정원(115)

입력 | 1999-05-13 19:34:00


상두 소리와 함께 꿈결처럼 꽃상여는 출렁이면서 언덕을 넘어갔다. 나는 가끔씩 꿈에서 그 느릿느릿한 그림을 다시 만나곤 했는데 소리도 또렷이 들리는 것 같았다.

황토현에서 독일제 크루프 기관총에 전멸한 동학쟁이들의 하얀 주검이 즐비한데 까마귀는 떼로 날고 바람이 붉은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휘이 불어 온다. 그런데 이걸 어째. 저들의 등과 가슴과 저고리 깃에 붙여 두었던 엉터리 부적 종이 조각들이 나비 떼처럼 불려 날아 오른다. 그리고 서부영화에 많이 등장하는데 예의라든가 군율이라든가 정치 이론에도 전혀 무식할뿐만 아니라 터무니없이 소리나 지르고 공포를 쾅쾅 쏘아대는 멕시코 농군의 오합지졸들이 동학쟁이처럼 보인다. 영감이 할미를 걷어차 아무렇지도 않게 죽고 살아나는 미얄 할미같이 저들은 비극도 없이 어처구니없게 죽고는 앞 뒤도 맞지않게 되살아난다.

나의 시인이여, 나는 당신의 혁명과 사랑이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라나이다. 언제든 놓아줄 준비를 할 터이니 가시난 듯 도셔오소셔.

하지만 나는 이 골짜기를 오래 지속시켜야 한다. 일 년, 그리고 이 년? 아니면 바로 내일 모레 글피.

그러나 어떻게 지속시키나.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살아가겠단 말이지? 그는 자신으로부터 영원히 증발해야 할텐데. 그와 나의 관계가 주는 이 긴장되고 생생한 느낌은 우리가 거대한 힘에 저항하면서 피난 중이기 때문일 거야. 어느 미국 여자뿐만 아니라 품 팔아 물건 사서 살아가는 모든 사회의 여자들이 다음과 같이 기록할 거야.

내가 혼자 있을 때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나의 남편 그리고 내 아들이라는 실제 세계의 인간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남편은 현실세계로 나간다. 나는 이 집이라는 상상의 세계에 남아 대개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일들을 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 관심을 보여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는 미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이러한 피난지에서 벗어나게 되더라도 우리는 처음의 것인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세상에 두발을 딛고서 빈 손으로.

당신은 우리네 산이 좋다구 하셨어요. 높은 산 말구 동네 뒤나 옆에 아니면 들판 바로 조오기 꿈지럭 꿈지럭 기어가는 흔한 야산 말예요. 당신은 어느 아침에 둘이서 밥을 먹다가 느닷없이 나에게 말했지요.

한윤희, 오늘 학교 나가지 말지.

안가면 쫓겨나요. 지난번에두 땡땡이쳤는데 머.

그랬더니 당신은 정말 어린애처럼 입을 쑥 내밀고 수저를 놓았죠.

좋아요 나 출근 안하면 뭘 할건데?

김밥 싸가지구 등산 가지. 김밥은 내가 말거야.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만 입을 벌리고 웃어버렸지요. 그랬는데 입으로는 결국 이렇게 말했어요.

하두 유혹이 근사해서 사표를 내버릴 거예요.

그놈에 학교는 불두 안나나?

어머, 소위 시인이 되겠단 사람이 학교에 불이 나기를 바래요?

당신은 늘 그러듯이 내친 김에 고집스럽게 밀어붙였지요.

학교가 없어지면 다른 교육 방법이 나오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