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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파이어니어 1]중앙병원 생명과학硏 이정희박사

입력 | 1998-12-31 18:06:00


1백61㎝ 키에 몸무게 58㎏. 날씬하진 않지만 하나도 안 부끄럽다. 그럼에도 ‘튀기 위해’ 입는 옷이 연두색 원피스 아니면 핫 핑크 투피스. 출근하면 동료들의 반응부터 살핀다.

“몸매가 안되면 색깔로라도 튀어야지.”

‘반응’과 그것의 ‘이상함’. 이것을 확인하는데 미친 탓에 인간이든 세포든 아주 특별하게는 암(癌)이든 ‘조짐’을 파악하는데 일인자가 됐다. 서울중앙병원 아산생명과학연구소 자기공명연구실 이정희(李貞姬·37)박사. 신체조직의 생화학적 대사 이상을 포착해 질병을 초기 단계에서 발견해내는 자기공명분광(MRS) 분야에선 국내의 독보적 인물.

“신체 조직도 세포도 사람 자체와 똑같아요. ‘싹’만 알아보면 미래가 보입니다.”

세계적으로 80년대 후반 처음 임상시험에 들어간 MRS. 기존의 자기공명영상(MRI) 방법은 암덩어리가 생기는 등 조직의 형태가 변할 지경이 돼야 영상으로 잡아낼 수 있다. 그러나 MRS 방법은 질병이 ‘꿈틀’거리는 순간 알아챈다. 조직검사 없이 진단하고 완치여부도 알 수 있다.

이 기술은 현재 뇌종양 저산소성 뇌병증 신부전증 등 일부 진단에 제한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간 심장 등 다른 기관까지 확대적용하는 방법을 누가 먼저 개발하느냐를 놓고 이박사는 미국 독일 스위스 등지의 연구진과 숨가쁜 ‘진도 경쟁’을 벌이고 있다. 자신이 몸담았던 연구소로 이 분야 최고인 미국 헌팅턴메디컬리서치와는 ‘경쟁관계’. 그는 지난해 5월 세계 최초로 자궁경부암 진단 MRS프로그램을 개발해 ‘반발자국 정도’ 앞섰다.

“세포와 조직이란 ‘미세한 삶’을 선택했지만 마음만은 ‘쫀쫀’하게 살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선지 ‘마이크로’ 세계의 이박사는 ‘매크로’ 세계의 천문학자와 결혼했다. 미국유학시절 같은 학교 천문학과 이명균(李明均·42·현 서울대 천문학과교수)씨와 88년 결혼.

“아내는 학자로서 추진력이 대단합니다. 가정에 소홀한 것도 아니지요. 육아와 요리도 베테랑급입니다. 아내가 만드는 버섯찌개는 뭐랄까, ‘리치’(rich·풍부)한 맛이죠.”(남편 이교수)

이박사는 미국에서 MRS연구를 시작했으며 93년 귀국했다. 그는 MRS진단 프로그램이라는 ‘신무기’를 의사들에게 제공하고 그들의 ‘전적’(시험결과)과 ‘참전기’(경험)를 토대로 데이터를 수정보완한다. 그래서 ‘협력’을 중시한다. 방사선과 소화기과 신경과 등과의 연구교류가 이 분야를 더욱 ‘리치’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요리는 재료를 아끼거나 속이면 제맛이 안나죠. 필요한 만큼 넣어야 합니다. 연구도 꾀를 내거나 대체품을 쓰거나 투자를 아끼면 바로 끝장납니다.”

‘리치’한 삶. 이박사는 처음으로 올해 배추김치(15포기)를 직접 담갔다. 굴 생태 낙지 등을 풍부하게 넣어 절묘한 ‘화학적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게 그의 비법.

“95년12월, 오전1시까지 동료연구원 환송회에서 삼겹살을 먹다 귀가한 이박사님이 아침6시에 둘째 아이를 낳았어요. 정말 독하지요?”(임근호·林根浩 연구원·30)

MRS와 관련한 최대관심사는 얼마나 빨리 진단범위를 넓히느냐는 것. 이박사는 “병원 당 환자수가 많고 질병이 악화돼 고통이 극심해야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은 것이 우리의 ‘불행한 풍토’지만 많은 데이터 확보엔 유리한 조건”이라고 말한다. 요즘에는 MRS를 세포단위로 적용해 기초 데이터를축적하는데몰두.동물실험도자주 한다.

“인체의 모든 기관에 MRS를 실용화하는 경쟁은 앞으로 10년 안에 승부가 날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꽤많이 빠져 고민. 일어나자마자 머리에 그루프를 말아 ‘붕’ 뜨도록 해 숱이 많아 보이도록 하는 게 중요한 아침 일. 새빨간 립스틱을 발라 상대의 시선이 ‘머리 아래’로 내려오도록 유도한다.

“오늘 한잔 올려보시오.”(남편) “한잔 올리지요. 뭐.”(이씨)

그가 남편과 함께 분위기 있는 밤을 만들 때 쓰는 대화법. 따끈한 청주 한잔을 나누며 네살짜리 아들에게서 배운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를 부른다. 그러면서 내일 아침엔 또 무슨 ‘색깔’로 사람들의 반응을 살필까 고심한다. 인류의 ‘리치’한 삶을 생각한다.

〈이승재기자〉sjda@donga.com

[이정희는 누구?]

△62년 서울출생 △1남6녀중 막내 △서울 삼광초등교 상명여중 수도여고졸 △85년 미국 오리건주립대 화학과졸 △88년 결혼 △89년 미국 워싱턴주립대 생화학석사, 90년 같은 대학에서 핵자기공명(NMR)연구로 생화학박사 △90∼92년 미국 UCLA대 생화학 및 분자생물연구소 연구원 △92∼93년 미국 헌팅턴메디컬리서치 연구원 △93∼98년10월 서울중앙병원 아산생명과학연구소 NMR연구실 선임연구원, 현재 NMR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