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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김영민 「진리·일리·무리」,事大-허위의식 비판

입력 | 1998-04-02 20:02:00


우리 시대에 인문학은 죽었는가, 살았는가.

근대화와 산업화의 초석이었던 효자(孝子) 자연과학도 아니고, 민주화의 첨병이었던 적자(嫡子) 사회과학도 아닌 인문학. 그 인문학은 말만 많고 벌이는 신통찮은 서자(庶子)에 불과한가.

전주한일대 김영민교수(40). 강단의 철학자가 오늘의 인문학 현실을 향해 던지는 질문은 가열하다 못해 분노의 역류마저 느껴진다.

인문학이란 것이 대체 뭔가. 인문학의 앎이란 본시,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사람의 세상’을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었던가. 인문학이란 늘상 삶에 발을 담그고, 앎과 삶 사이의 끊임없는 ‘통풍(通風)’ 속에서 자라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앎은 삶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렸다. 오늘날 인문학은 꽃씨를 땅에 떨어뜨리지 못하는 꽃의 운명이랄까, 불임(不姙)의 학문으로 곤두박질쳤다.

철학과현실사에서 펴낸 ‘진리·일리·무리’.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민음사)에서 솟구쳤던 김교수의 문제의식이 치열하게 타오른다.

우리의 터가 삭이고 우리의 역사가 묵힌 이치들을 계승하지 못한 절맥(絶脈)의 인문학. 삶에서 벗어난 앎이 근거 없는 수사와 개념에 취하고 급기야 ‘관념의 숙취(宿醉)’마저도 학문의 깊이로 오도되는 지적 풍토.

김교수는 말한다. “인문학은 이제 자신의 음성마저도 낯설다….”

인문학의 지적 지형에서 자생력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김교수. 사대(事大)의 눈치와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우리 삶의 터와 역사에 맞는 ‘생각의 집’을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책 제목이 왜 ‘진리·일리·무리’일까.

서양철학, 그 지적 여정의 종착역인 ‘진리’. 근대성은 진리를 포획하기 위해 인식과 이성만 있고 사람은 없는 지적 풍경을 숨가쁘게 달려왔다. 이에 대한 반동이 ‘무리’. 진리에의 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세기말적 저항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 대한 반성 없이 무비판적으로 서양의 지적 맥락에 편승했다는 비판이다. 거품처럼 현란한 동작만이 도드라지는 ‘악성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단적인 예.

그래서 김교수는 삶의 실질적 공간에서 설득력 있는 이치로서 ‘일리’를 주장한다.

삶의 근원적 애매성을 견디고 사귀는 인문학적 토양 위에서 싹을 틔우는 ‘일리’. 만남 사귐 긴장 참을성 성숙, 그리고 상상력과 감동이라는 인문학적 관계와 부대낌 속에서 어렵사리 열매를 맺는.

김교수는 묻는다. 왜 아는 만큼 스스로 바뀌지 않는가, 왜 아는 만큼 주변을 변화시킬 수 없는가. 학문이란 단지 관념의 계몽, 문자의 계몽에 불과한 것인가.

그래서 그가 붙잡은 화두가 ‘학행일치(學行一致)’.

우리가 근대화 과정에서 망실해버린, 그러나 우리 핏속에 귀소본능처럼 살아 있는 지적 전통. 철저하게 서양을 배운 끝에 ‘고고학적 기억’을 통해 찾아낸 돌파구다.

그가 새로운 글쓰기와 말하기로서 철학을 주장하는 연유다. 말과 글이 심리학적 관념의 단계를 넘어서 실존적 차원의 존재를 ‘치는’, 덕(德)으로서 글쓰기와 말하기.

글과 말의 힘이 나를 바꾸고, 상대방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성숙의 전략으로서 글쓰기와 말하기. 이때 글쓰기와 말하기는 철학적 도구이자 사회적 성숙의 기제다.

김교수는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2천편의 시를 쓴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철학적 지향을 담은 시 한편을 들어보자.

‘무늬 하나를 보면서/생각을 죽이고 몸을 낮추니/그 위로 떠오르는/힘찬 속삭임/오랜 하늘과 긴 바람이 살아 있고/안팎의 분별조차 없이’ 〈인문(인문)이란 본시 사람의 무늬를 이름이니, 무늬 하나란 ‘일리’를 가리킬 터. 생각을 죽이고 몸을 낮춘다 함은 삶의 터와 역사에서 벗어난 헛된 관념과 상상을 떨쳐냄이니, 그리 하고서야 오늘에 살아 숨쉬는 선인들의 인문정신을 만나누나. 이제 비로소 앎과 삶이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경지를 알겠다….〉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