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불러온 ‘인공지능(AI) 거품론’에 코스피가 5% 넘게 하락했다. 투자 심리가 얼어붙은 외국인이 ‘셀 코리아(국내 증시 순매도)’를 이어가면서 원-달러 환율이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1549원까지 치솟았고, 인천국제공항 환전 창구에선 달러당 1600원을 넘겼다.
5일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478.82포인트(5.54%) 하락한 8,160.59로 마감했다. 장 초반부터 외국인들의 매도 물량이 쏟아져 오전 9시 8분 매도 사이드카(프로그램 매도 호가 효력정지)가 발동됐다. 올 들어 10번째 나온 매도 사이드카였다.
이날 증시를 뒤흔든 원인은 ‘브로드컴 쇼크’였다. 브로드컴은 회계연도 2분기(2∼4월) 실적에서 호실적을 냈지만, AI 반도체 실적과 전망치는 시장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다. 4일(현지 시간) 뉴욕 증시에서 브로드컴 주가는 12.6% 하락했고, 시가총액 2850억 달러(약 438조 원)가 증발했다. 일일 시총 하락 폭으로는 미국 기업 역사상 네 번째로 컸다.
브로드컴의 AI 반도체 실적 전망이 꺾이며 고공행진하던 메모리 기업의 주가가 꺾였다. 여기에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 ‘베라 루빈’에 메모리 탑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도 더해졌다. 마이크론(―7.74%)과 샌디스크(―3.92%)의 주가가 꺾인 데 이어 5일 코스피에선 삼성전자(―6.40%)와 SK하이닉스(―9.92%)가 동반 하락했다. 전반적인 위험자산 선호 심리가 위축되며 코스닥지수도 4.5% 하락한 1,002.44로 마감했다. 코스닥지수는 장중 992.8까지 하락해 3월 4일 이후 석 달 만에 장중 1,000 선이 깨지기도 했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반도체 산업의 피크가 생각보다 일찍 올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며 주가가 크게 흔들렸다”며 “환율이 오르자 환손실을 피하기 위해 외국인이 국내 주식을 팔고, 그 결과 환율이 더 오르는 악순환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외국인은 코스피에서 3조5000억 원가량을 순매도했다. 지난달 7일부터 이날까지 20거래일 연속 순매도하며 총 70조1100억 원어치를 팔아치우고 있다.
외국인의 매도세가 커지면서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 대비 9.4원 오른 1539.1원으로 주간거래를 마쳤다. 환율은 장중 1549.1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금융위기 여파가 이어진 2009년 3월 10일(1561.0원) 이후 가장 높았다. 이날 오후 인천공항 은행 환전 창구에서 여행객이 달러를 살 때 적용되는 환율은 1600원을 넘겼다.
전문가들은 원-달러 환율의 상승 압력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국내 외환시장의 수급이 빠듯한 상황에서 중동 상황의 장기화,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불확실성 등이 변수”라며 “환율 안정을 위한 외환 당국의 개입 방안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홍석호 기자 wil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