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역 마루노우치 방면 출구로 나와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고풍스러운 흰색 외벽의 6층 건물이 보인다. 옛 일본 중앙우편국 건물을 복합쇼핑시설로 리모델링한 ‘깃테 마루노우치’다. 그 위로는 유리벽 마천루가 솟아 있지만, 깃테 마루노우치만큼은 옛 건물을 그대로 살린 도쿄역과 어우러져 요즘 말로 ‘뉴트로’ 분위기를 풍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에 인접한 세운4구역 개발을 두고 서울시와 국가유산청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고층 개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등장하는 사례가 바로 도쿄역 일대 개발이다. 중요 문화재인 도쿄역을 보존하는 대신 그 용적률을 주변 건물이 나눠 가지고, 문화재 바로 코앞에도 초고층 빌딩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쿄역이 그렇게 개발했으니 세운4구역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종묘와 세운지구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도쿄역 개발 사례를 제 입맛대로 끌어오는 ‘아전인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주변 환경만 봐도 그렇다. 도쿄역에서 마루노우치 광장을 지나 두 블록만 걸으면 일왕이 거주하는 고쿄(皇居)가 나온다. 전체 너비는 230만 m2, 외곽 정원만 100만 m2가 훌쩍 넘는 거대한 녹지다. 4구역에서 시작해 남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빌딩숲을 이루게 될 세운지구와는 비교하기가 어렵다.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와 달리 도쿄역은 늘 사람들로 붐비는 근대 건축물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개발의 문법도 다르다. 깃테 마루노우치처럼 도쿄역 앞 건물들은 대부분 6, 7층 높이까지 옛 건물 외관을 보존하고 그 위에 빌딩을 올렸다. 덕분에 100년 전 모습이 고스란히 남은 거리를 관광객과 회사원들이 뒤섞여 오가는 특유의 풍경이 만들어졌다. 고층 개발을 하며 나온 개발이익 일부가 도쿄역 복원에 사용되기도 했다. 4구역 개발이익을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녹지축을 조성하는 데 사용한다고 하지만, 종묘의 가치를 높이는 데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도쿄에는 도쿄역 일대처럼 초고층 개발을 한 지역도 있지만 시모키타자와나 다이칸야마처럼 건물 높이를 제한하고 저층 개발을 한 지역도 있다. 모두 그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기 위한 최적의 개발 방식을 고민한 결과다. 익선동과 서순라길의 오밀조밀한 건물들,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로 이어지는 경관은 이 일대의 고유한 콘텐츠다. 골목골목을 채운 관광객들이 이미 그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세운지구가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런 고유한 장점을 스스로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다.
물론 세운지구 개발이 수십 년째 정체되면서 슬럼화가 진행되고 있어 더 이상 개발을 미룰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서울시의 새 계획이 건물 수를 줄여 녹지를 더 많이 확보하는 방법인 것도 맞다. 사람들이 늘 사용하고 드나드는, 삶 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문화재만이 생명력을 갖고 그 가치를 이어 나갈 수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서울시와 국가유산청 모두 종묘와 세운지구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고 확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화해야 한다. 불필요한 갈등으로는 종묘의 보존 가치도, 세운지구의 개발 가치도 모두 잃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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