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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나빠 물러날 각오 했지 다 내탓이야

Posted November. 11, 2009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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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부터 기자들 전화가 계속 오더라고. 무슨 일인가 했지. 오늘 그걸(일구대상) 보도자료로 돌린 거야. 야구인들이 주는 상이니 의미가 깊지. 하지만 좀 아쉬워. WBC 덕분에 받는 건데 이왕이면 우승했으면 좋았잖아. 허허.

김 고문은 한화 감독으로 상을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9월 25일 삼성과의 마지막 경기가 끝난 뒤 더는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2-1로 이기고 그에게 마지막 승리를 선물한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엎드려 떠나는 그에게 큰절을 했다.

울컥했어. 예상 못한 일이었거든. 선수들한테는 많이 미안해. 대표팀을 맡는 바람에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어. 부상 선수는 왜 그리 많이 나왔는지. 다 내 탓이야.

말 많았던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이 궁금했다. 혹시 내심 하고 싶었던 건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무슨 소리야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2006년 1회 대회 때도 (몸이 안 좋아)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걸 또 하고 싶겠어. 그런데 결국 하일성(전 KBO 사무총장)한테 당했지(웃음). 대전에서 마무리 훈련을 시키고 있는데 연락이 왔어.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났지. 저녁을 안 먹었던 참이라 한쪽 방에서 나 혼자 밥을 먹다 홀에 있는 하 총장을 쳐다봤는데 컵에 가득 담긴 술을 한입에 털어 넣더라고. 밥을 먹다 다시 쳐다봤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또 원샷을 하는 거야.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대표팀 감독 얘기를 꺼내더라고. 내가 쳐다볼 때만 술을 마신 건데 그때는 몰랐지. 나중에는 윤동균(KBO 기술위원장)까지 오더니 절을 하며 부탁을 하더라고. 일단 생각은 해보겠다고 했는데 다음 날 KBO가 나한테 감독을 요청했다는 기사가 나왔어. 어떤 분은 축하한다는 말까지 하더라고. 그런 상황에서 안 맡겠다고 할 수는 없잖아.

김 고문은 감독직 요청을 받으면서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회사(한화)에 허락을 받을 것, 코칭스태프는 프로야구 감독 중에서 선임해 줄 것 등이었다. 하지만 어느 감독도 코치로 오려 하지 않았다. 선수 선발도 쉽지 않았다. 김 고문은 국가가 있어야 야구도 있다는 말로 선수들을 독려했다.

한국은 메이저리거들이 즐비한 강팀들을 잇달아 격파하며 결승에까지 올라갔다. 비록 일본에 아쉽게 졌지만 국민은 감동의 3월을 만끽했다. 하지만 한화는 초반부터 하위권으로 처졌고 창단 이후 처음으로 최하위의 수모를 겪었다. 조심스럽게 나돌던 감독 교체설은 현실이 됐다.

각오는 하고 있었어. 성적이 너무 안 좋으니 할 말이 없지. 마지막 경기에서 선수들이 절하는 걸 보니 이제 끝이구나 실감이 나더라고.

1991년 쌍방울 사령탑으로 데뷔한 김 감독은 1995년부터 두산(OB) 감독으로 9년을 보낸 뒤 2004년 한 해를 쉬고 2005년 한화에 부임했다. 5년 만에 맞은 휴식이다.

1주일에 2번씩 침을 맞아. 매일 걸으며 운동도 하고. 일요일에는 집 근처 호프집에서 이종도 등 야구인들과 꼭 만나지. 맥주 한잔 놓고도 몇 시간은 버틸 수 있어.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요즘 건강이 가장 좋아.

김 고문은 통산 1000승에 20승만 남겨뒀다. 언제 채울지는 알 수 없다. 한화 고문을 맡고 있지만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그는 언제쯤 그라운드에 돌아올 수 있을까.

그건 내가 알 수 없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잖아.



이승건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