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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물단지서 국내 3대 댐으로

Posted October. 14, 2005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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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댐, 끊임없는 논란의 시작

1986년 10월 30일 이규효() 당시 건설부(현 건설교통부) 장관은 북한이 200억 t의 저수용량을 가진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있으며, 댐이 무너지면 서울 여의도 63빌딩 중턱까지 물이 차오를 수 있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나라가 온통 뒤집어졌다. 20여 일 뒤인 11월 26일 정부는 대응 댐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평화의 댐의 시작이었다.

이후 정부는 국민에게 건설성금을 모금해 6개월 만에 639억 원을 거뒀고, 1987년 2월 대대적인 착공식을 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수공() 조작설이 끊임없이 제기됐고, 1990년 이후 공사는 중단됐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뒤 감사원은 금강산댐 위협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졌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1986년 말 거세어지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수공 위협으로 잠재우고 정치 국면을 전환하려 했다는 것.

이후 댐은 무용지물처럼 여겨졌고 그대로 방치됐다.

그러다 2002년 1월 북한이 수공을 하지 않더라도 금강산댐의 안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징후가 발견됐다. 정부는 같은 해 5월 평화의 댐 2단계 증축공사를 선언하고 9월 공사를 재개했다.

금강산댐 붕괴돼도 홍수 걱정 없어

1989년 1단계 공사 직후 평화의 댐은 높이 80m에 저수용량은 5억9000만 t에 불과했다.

이제 2단계 증축공사가 끝나면서 높이가 125m로 45m 높아지면서 국내에서 가장 키가 큰 댐이 됐다.

저수용량도 26억3000만 t으로 소양강댐(29억 t), 충주댐(27억5000만 t)에 이어 3번째로 크다. 탄생의 원인이 됐던 북한 금강산댐(26억2000만 t)보다도 1000만 t 많다.

평화의 댐 건설에는 국민성금 639억 원을 포함해 모두 3995억 원이 투입됐다.

건교부 전병성() 수자원기획관은 컴퓨터 모의실험 결과 금강산댐의 물을 모두 남쪽으로 흘려보내더라도 평화의 댐에 대부분이 갇히고, 일부 넘치는 물은 화천댐 앞 파로호에 담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금강산댐으로 인한 홍수 피해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고 자신했다.

관광상품으로 거듭날까

한국수자원공사는 증축공사와 함께 평화의 댐 건설로 훼손된 주변 지역 복구 공사에도 공을 들였다. 공사에 쓰일 돌을 캐내며 헐벗었던 댐 주변 채석장에 나무와 화초를 심어 푸른 모습을 복원했다.

1단계 공사 후 방치되면서 거대한 시멘트 괴물을 연상케 했던 댐 본체도 이번 공사를 통해 말끔히 정비돼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기에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댐 위 도로에는 잠시 쉬어 가며 구경할 수 있는 전망 공간이, 댐 주변에는 물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 주는 조형물이 설치된 물 문화관 광장이 조성됐다.

댐 주변에 관광객용 야영장과 산책로 등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평화의 댐 인근이 고향으로 1단계 공사 때부터 인부로 참여했다는 박용태(57양구군 방산면 오미리) 씨는 주변에 많은 휴식공간이 조성돼 평화의 댐이라는 이름값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화천군도 평화의 댐 주변 지역을 테마관광지로 만든다는 방침에 따라 대규모 야생동물 쉼터공원과 비무장지대(DMZ) 및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수거한 탄피를 모아 만드는 평화의 종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황재성 최창순 jsonhng@donga.com cs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