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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연금술사 3인

Posted April. 25, 2005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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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리그 8연패에 빛나는 삼성화재를 꺾고 만년 2위 현대캐피탈을 프로배구 원년 정규리그 정상에 올린 김호철(50) 감독. 유럽 2류 선수로 구성된 PSV 아인트호벤에 네덜란드리그 우승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4강을 안긴 거스 히딩크(59) 감독. 그리고 프로야구 만년 하위팀 한화를 맡자마자 5연승으로 이끌며 강호로 탈바꿈시킨 김인식(58) 감독. 세 사령탑은 과연 어떤 장점을 갖추고 있기에 탁월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2003년 11월 현대캐피탈 사령탑을 맡은 김호철 감독은 이탈리아에서 온 기술 분석관과 체력 담당관에게 한 가지 임무를 맡겼다.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은 물론 라이벌 삼성화재를 상대로 한 공격과 수비 성공률과 실패율 등을 차곡차곡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토록 한 것.

이를 토대로 김 감독이 간파한 선수들의 아킬레스건은 체력. 이탈리아에서 체험한 맞춤형 웨이트트레이닝이 바로 선수들에게 전달됐다. 무릎을 다친 후인정에게는 하체 보강 훈련을 시키는 등 선수 개개인이 4주 단위로 끊어서 체력 강화훈련에 들어갔다.

그 결과 현대캐피탈은 더 이상 삼성화재에 체력에서 밀린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KT&G 프로배구 2005 V리그에서 만년 2위 현대캐피탈이 95년 슈퍼리그 이후 10년 만에 정규리그 정상에 오른 비결이 여기에 있다.

배구인들은 김 감독을 꾀장이라고 부른다. 잔꾀의 대가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다. 전쟁이 일어나도 그 만은 살아남으리라는 얘기. 뒤집어 말하면 그 만큼 상황에 따른 대처 능력이 탁월하다는 얘기다.

20032004 V리그 때 일이다. 졸전을 치르고 경기 용인시 숙소로 돌아온 김 감독은 선수들을 호수에 빠뜨렸다. 한겨울 영하의 날씨였다. 그리고 10개월 뒤. 한국배구최강전에서 삼성화재에 패한 뒤 김 감독은 다시 선수들을 체육관에 불러 모았다. 호수 사건으로 혼이 났던 터라 선수들은 몸을 떨 수밖에.

그러나 김 감독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수고했으니 사흘간 쉬다 오라는 얘기였던 것. 사흘 뒤 선수들이 모두 머리를 짧게 자르고 숙소에 돌아왔음은 물론이다.

그는 삼성화재와 맞붙을 때마다 지나치리만치 과장된 포즈로 목소리를 높이며 행동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삼성화재만 만나면 주눅 드는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서라는 것. 회식자리에선 야, 선수 땐 내가 신치용(삼성화재 감독)보다 나았어. 그러니 걱정마라며 투쟁심을 불어넣기도 한단다.

그래서일까. 이젠 선수들이 삼성화재를 만나면 김 감독보다 오히려 더 열을 낸다고. 이쯤 되면 정말 여우가 아닌가.

2002월드컵을 준비하던 거스 히딩크 당시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은 2001년 6월 대륙간컵이 끝난 뒤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를 대표팀에 뽑지 않았다. 이듬해 3월 스페인 전지훈련 전까지 약 9개월간이었다. 당시 대표팀 맏형에 카리스마까지 겸비한 홍명보는 후배들의 우상. 그런데도 히딩크 감독은 일부러 뽑지 않았다. 홍명보는 물론 노장과 젊은 피들을 한꺼번에 자극해 경쟁을 유도한 것. 결국 이 같은 용병술은 4강 신화의 밑거름이 됐다.

히딩크 감독은 20042005 네덜란드리그 우승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PSV 아인트호벤을 4강으로 이끌면서도 이 같은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아인트호벤은 유럽무대에서는 축구의 변방. 태극전사 박지성 이영표를 포함해 헤셀링크, 제페르손 파르판, 다마르커스 비즐리 등 주전 대부분이 키워서 팔 유망주들이다.

한때 주장 반 봄멜을 포함한 일부 선수들은 박지성과 이영표를 무시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과 이영표에겐 끝없는 신뢰를, 다른 선수들에게는 상대국 언어 배우기 등으로 포용하는 법을 가르쳐 결국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히딩크 감독은 다양한 문화의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일도 아름답다라며 조화를 강조했다. 내세울 만한 유명 선수가 없으면서도 괴력을 발휘하는 아인트호벤의 비결은 이 같은 끈끈한 조직력이다.

위기도 있었다.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끌고 잉글랜드에서 유로96에 출전 중이던 그는 감독이 못하는 선수만 기용한다. 머리가 모자란 것이 아니냐고 대든 에드가 다비즈를 강제귀국시켰다.

이 바람에 우승후보 네덜란드의 분위기는 흔들렸고 8강에 그쳤다. 게다가 수리남 출신 선수들인 카벨그룹과의 불화가 밝혀지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카벨그룹을 포용했고 결국 98프랑스 월드컵에서 이들을 중심으로 해 4강에 올랐다.

아인트호벤은 27일 오전 AC밀란과 유럽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에서 맞붙는다. AC밀란은 호화멤버로 짜여진 강호. 히딩크 감독이 이번엔 어떤 용병술로 한 수 위인 AC밀란을 혼내줄지 궁금하다.

탤런트 주현을 쏙 빼닮은 코믹한 말투, 호남 토박이보다 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서울 사람, 감독이라기보다는 이웃집 아저씨나 큰 형님 같은 편안함. 평소 무심해보이기까지 하지만 선수의 경조사까지 일일이 챙겨 기어이 눈물이 맺히게 만드는 자상한 스승. 선수들은 이런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김인식 한화 감독. 그는 1년간의 야인생활을 접고 올해 초 한화 사령탑에 취임할 때만 해도 걱정이 앞섰다. 4년 연속 꼴찌 롯데에 가려서 그렇지 한화 역시 2000년대 들어 만년 하위 팀.

1990년대 초 창단 감독을 맡았던 쌍방울, 9년간 장수하면서 2번이나 우승을 일궜지만 해마다 한두 명씩 스타 선수를 다른 팀에 내줘야 했던 두산 시절의 판박이였다.

어차피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할 처지. 김 감독은 버려진 선수들을 끌어 모으는 폐품 공장장의 역할을 다시 한번 자처했다.

기아에서 방출된 15년차 김인철, 삼성과 재계약에 실패한 재일교포 고지행, 오갈 데 없던 자유계약선수 오봉옥이 이 과정에서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기나긴 부진의 늪에 빠져 있던 선발 정민철 문동환 김해님과 마무리 지연규, 고참 장종훈 이도형 등 기존 선수에게도 한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민철은 지난해 1승도 올리지 못한 나에게 전지훈련 때부터 한번도 빼놓지 않고 선발 기회를 보장해줬다며 감격해 했다. 지난 주말 청주경기 땐 이곳이 처가인 이도형이 선발 출전을 자청하자 승패에 개의치 않고 허락했다.

결과는 대만족. 투수에서 타자로 늦깎이 변신한 김인철은 홈런 깜짝 선두(6개)를 달렸고 이도형은 장모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쐐기 홈런을 날렸다. 승보다 패가 많던 마운드에는 막강 선발진이 구축됐다. 정민철은 어느새 3승으로 다승 공동선두. 연습생으로 재입단하는 설움을 겪었던 36세 노장 지연규는 5세이브를 따내며 한화의 뒷문을 지키는 버팀목이 됐다.

야구인들은 김 감독이 지난겨울 뇌중풍으로 한 달여간 병마와 싸우지 않았더라면 지금 한화는 더 좋은 성적을 내고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양종구 장환수 yjongk@donga.com zangpabo@donga.com